[원불교신문=정도성 도무]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 1957년 동아일보에서는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않을 수 있는 거리를 석 자라고까지 보도한 바 있다고 한다.(jtbc 뉴스룸, 손석희의 앵커브리핑에서) 그만큼 경외심을 가지고 존숭하라는 말인데, 반면에 이 말 대로 한다면 참으로 스승은 두렵고 가까이하기 어려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요즈음 스승의 날에는 '군사부일체'나 '스승의 그림자' 담론은 그리 많이 나오지 않지만, 그래도 '스승'이라는 말이 주는 위계적 정서를 거부하기도 하고, 많은 학교가 스승의 날을 재량 휴업일로 삼아 학생과 선생님의 만남 자체를 봉쇄(?)해, 스승의 날이 스산한 날이나 서먹한 날이 되고 있다.

원불교는 스승이 많다. 〈정전〉 교의편 사요 중, '지자본위'는 모두 스승에 대한 교리다. '솔성의 도와 인사의 덕행이 자기 이상이 되고 보면 스승으로 알 것이요.' 이 말씀을 살펴보면 따로 지위와 권위를 가진 스승을 설정해 경외심을 갖도록 유도하는 것과는 다른 말씀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솔성의 도와 인사의 덕행'과 같이 고매한 인품을 사모하는 것뿐 아니라, 모든 정사에서, 생활에 대한 지식에서, 학문과 기술면에서, 심지어 기타 모든 상식에까지, 나 이상이 되는 분은 스승으로 알라는 말씀이다. 이는 나를 진급시키는 일이라면 어떤 분야든 가리지 않고 나 이상이 되는 분은 다 스승 삼아 배우라는 것. 또한 선악이 모두 내 스승이라는 말처럼, 진실로 세상에 스승 아님이 없지 않은가.

지금 국가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스승의 날은 주로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는 분들을 존숭하는 날이다. 내 삶의 중요한 시점에 내 정신을 길러준 '스승'의 은혜는 참으로 크고 존경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지자본위'에서 보여주는 스승은 그렇게 대상화된 스승뿐 아니라 그 범위와 의미를 더욱 확장시켜 놓고 있다. '자기 이상이 되고 보면'이라는 단서만 충족하면 누구나 스승이다.

이를 통해 보면 교사만 학생들의 스승이 아니라 학생도 교사의 스승이 될 수 있고, 자녀도 부모의 스승이 될 수 있다. 어린이도 늙은이의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상 한 분만 부처로 모실 것이 아니라 천지 만물 허공 법계를 다 부처님으로 모시기 위하여 법신불 일원상을 숭배하자는 것이니라."(<대종경> 교의품 14장) 또는 '우주 만유는 곧 법신불의 응화신'(〈정전〉 제 10장 불공하는 법)이라 하며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대의를 천명해준 것처럼 '처처스승, 사사공경'이 아니던가. 게다가 다음 말씀은 대상화된 스승관을 뛰어넘어 새로운 스승관을 확고하게 보여준다. 

"후일에 또 다시 나의 스승을 묻는 사람이 있으면 너희 스승은 내가 되고, 나의 스승은 너희가 된다고 답하라."(〈대종경〉 변의품 21장) 

민자연화는 대종사가 공양하고 남은 밥을 즐겨먹었다. 그걸 보고 들려준 말씀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부처님과 친근하면 자연히 부처님을 배우게 된다는 말씀(변의품 16장)인데, 스승과 석 자 거리로 떨어져 그림자도 밟지 않으면 어찌 스승과 친근해져 그 스승을 배울 수 있을까. 그렇다. 스승, 그 이름은 수직적 권위가 아니다.

/원경고등학교

[2018년 6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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