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교구 만경교당 라성금 교도


[원불교신문=이여원 기자]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었을까. 아니, 인생의 고락을 거스르지 않은 한 생애. 만경교당 의타원 라성금(86·疑陀圓 羅性錦)교도, 그의 생애가 그랬다. 상당한 자산가였지만 자식을 얻지 못했던 그의 부친은 대를 잇기 위해 둘째부인을 맞이했다. 그렇게 어렵게 얻은 첫딸이 그였고, 어머니는 3년만에 남동생을 낳아 집안의 대를 이었다. 그러나 남동생이 두 살 되었을 무렵, 조부가 돌아가셨고, 그의 양친과 남동생까지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감당못할 가족과의 이별이었고, 슬퍼할 겨를도 없이 그는 세상에서 혼자가 됐다. 살아가야 하는 일이, 온통 그의 몫의 책임이었던 것도 이때부터다.

그 기구했던 삶의 이야기를 그는 동요없이 차분하게 전했다. 신앙으로 깨달은 깊은 삶의 혜안일 터. 말하는 이보다 듣는 이의 가슴이 더 먹먹해지는 까닭이다. "지금 내 나이가 야든여섯(86)인데, 열여섯살 때 양어머니(김봉숙 교도)를 따라 수계농원에 들어갔어요. 양어머니는 대종사님 당대때 입교한 교도셨어요. 당시 수계농원에 전이창·이형국 교무님이 계셨는데, 이 두 분 교무님을 모시고 살았지요" "그때 교무님께서 그러셔요.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절대 복종의 신뢰가 있어야 한다'." 스승과 제자사이 어떤 말도 책임있게 듣고 행하는 절대복종의 신뢰로 지냈던 그 시절이, 어쩌면 그의 신앙에 주춧돌이 됐는지 모른다. 

그러나 교단 순환인사로 수계농원 교무의 이임 등 그의 수계농원 생활은 그리 길지 못했다. 외손이라도 봐야 한다는 고향 집안어른들의 성화도 있었다. "교회 전도사였던 큰어머니 집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어요. 하루하루 참 힘든 나날이었지요. 하루는 교인들이 집으로 들어와서 제가 가지고 있던 <불교정전>을 불태우라고 그래요. 당장 불태우지 않으면 측간(화장실)에 두고 휴지로 쓰라고 하는데, 정신이 아찔해졌죠." 

배우지 못해 종교윤리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내 신앙은 절대 잘못된 게 아니라는 확신, 자기 신앙이 소중하면 다른 사람의 신앙도 소중하다는 생각, 여러 생각들이 스치면서 그는 무릎 위에 <불교정전>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목사에게 말했다. '여기에 성냥 하나 그어주시오.'

당시 목사가 신도들에게 했던 말, "예수를 믿든, 불교를 믿든, 신앙을 가지려면 이 아가씨처럼 믿어라." 그리고 "큰어머니와 신앙이 다르니 헤어져 살아라. 이 신앙심으로 살아간다면 어디서든 잘 살 것이다"라고 했던 말을, 그는 이후 오랫동안 기억했다.

법회날은 내 날, 50여 년 순교정신으로 무결석
내생에 전무출신 서원, 어려운 이 돕고 싶은 일념

그렇게 그는 마음속에 원불교를 품고 시집을 갔고, 시댁이 있는 만경에서 터를 잡았다. 그의 삶이 녹록치않음은, 말로도 글로도 다 표현못할 호된 시집살이 20년이 대변해줄까. 그 험한 시절 그를 버티게 했던 것은 원불교다. 그렇게 그의 나이 서른일곱되던 해, 드디어 만경교당 법당건물이 지어졌고 이후 교당은 그의 '영생의 터전'이 됐다.

"못 배워서 공부할 줄도 모르고, 넉넉한 형편이 아니어서 교당에 큰 도움은 못되지만, 법회는 빠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을 했어요. 일 무서운지 모르고 몸이 녹아나게 농사일을 하면서도, '법회날은 내 날이다'는 마음으로 꼭 참석했지요. 지금까지 50여 년을 무결석으로 교당에 다녔어요." 

간고한 살림에 6남매를 번듯하게 장성시키기까지, 서울보화당한의원과 대전수양원에서 일을 하며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 시절에도 그는 인근 교당을 다녔고, 헌공금은 만경교당으로 보냈다. 시골교당의 '뻔한 살림'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한푼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한참동안 이어진 그의 삶의 여정은 만경교당 신축봉불로 이어졌다. 현 교당 건물을 매입해 리모델링 중인 만경교당은 내달 7월 신축봉불식을 진행할 예정이다. 교당 바로 옆집 건물도 구입해놓은 상태다. "이진도 교무님이 2천만원을 손에 쥐고 3년만에 교당을 매입했어요. 쑥떡이며 모과차며 밑천될만한 음식 만들어서 팔고, 알뜰살뜰 아껴모아 생활하면서 빚 안지고 건물을 살 적에는, 그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으시죠."

"생불이라고 생각해요. 교무라는 상이 하나도 없고, 내가 할 일이라고 말씀하셔요. 그러니 나도 내 할일 해야지요." 그 또한 교당 리모델링을 위해 전 재산을 아낌없이 희사했다. 손가락 마디마다 굽고, 노동으로 굵어진 양 팔 손목, 그렇게 땀흘려 모은 헌공금을 그는 두 생각없이 전했다.

"별스럽게 실천하는 것이 없어요. 새벽4시에 일어나서 한시간 동안 좌선하고 독경하고, 한시간은 원음방송 설법 듣지요. 저녁에는 9시부터 한시간동안 사은헌배를 하고, 10시부터는 원음방송 들으면서 교전공부해요. 그렇게 따라서 생활하고 있어요."'따라서'하는 생활이라고는 하지만, 그는 '졸면서'도 그 시간을 다 바친다. <대종경> 인과품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온 그. "이생에 지은 업, 이 생에 다 갚고 갔다가, 내생에는 전무출신하고 싶어요. 고생하는 후진들 영생길 인도하면서 영생토록 이 공부 이 사업할 수 있기를 그저 염원합니다."  

자신의 삶을 순연히 받아들이며 영생의 서원을 간직한 의타원 라성금 교도. 그의 깊고 정한 웃음이, 이후로도 오랫동안 가슴 안에 머물렀다. 

[2018년 6월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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