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정도성 도무] 〈금강경〉에 나오는 사상(四相)에 대해 불가의 해석을 보면 참으로 분분하다. 초기불교의 해석과 대승불교의 해석, 그리고 혜능선사의 해석 등 종류도 다양하다. 그래서 더위잡기도 어렵다. 일반적으로 불교적 해석을 종합해보면 아상은 오온의 집합체인 나에 집착하여 나를 높이는 것을 말하고, 인상은 나와 남을 분별하거나 타인을 낮추어보는 것을 말한다. 중생상은 중생의 어리석고 나약한 심리를 뜻하며, 수자상은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이나 높은 지위에 오르고자 하는 마음, 또는 뭔가를 얻었거나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뜻한다. 

〈대종경〉에 마침 〈금강경〉의 사상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제자가 있어 아주 쉽게 해석하는 대목이 나온다.(변의품 19장) 받들어 읽어보면 그야말로 '간단히 실지에 부합시켜', 그 뜻이 분명하도록 일러줬음을 알 수 있다. '고래로 여러 학자들의 해석이 많이 있는' 사상을 이보다 더 쉽게, 이보다 더 명확하게 해석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런데 대종사의 사상 해석을 관통하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나는 그것이 '평등'이라고 본다. 아상은 나와 나 이외의 모든 대상들과의 관계를 말한다. '모든 것을 자기 본위로만' 생각하는 자존심을 일컫는 아상은 자기 본위로만 생각하기에 나와 타자의 차별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이 아상을 없애려면 그 어떤 것도 정해진 내 것이 아니라는 무상의 이치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무상이 평등이다. 달도 차면 기울고, 극하면 변하며, 영원한 내 것은 없다는 것, 이것이 평등이다. 

아상이 '자기 본위'로 국한된 상이라면 인상은 '인간 본위에 국한'된 상이다. 최령한 인간과 하등한 동물들 간의 차별이다. 그래서 다른 동물들을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다는 인식이고, 더 나아가 만물이 생태적인 그물망으로 이어져 있다는 사상(思想)과도 대립된다. 이 인상을 극복하기 위해 육도 사생의 이치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육도 사생의 이치에 따라 몸이 바뀌는 것이 평등이다. 사람과 다른 동물, 다른 생명 간의 평등이다.

중생상은 부처와 중생의 차별을 뛰어넘어 근본적인 평등관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본시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 부처가 매하면 중생이요 중생이 깨치면 부처'라는 무차별의 지혜이다. 부처와 중생이 그 종자가 따로 없다는 말이니, 우리 어리석은 중생에겐 큰 복음이다. 마지막으로 수자상은 나이, 연륜, 지위를 앞세우는 상인데 현실의 삶 속에서 참으로 자주 볼 수 있다. 이 수자상은 대종사의 말씀대로 성품에는 차별이 없으므로, 노소와 귀천의 평등, 사회적인 관계의 평등을 이루는 기점이 된다. 

요약컨대, 아상은 나와 타자간의 평등으로, 인상은 사람과 타 생령간의 평등으로, 중생상은 부처와 중생간의 평등으로, 수자상은 노소와 귀천간의 평등으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걸림돌이다. 하지만 디딤돌이기도 하다. 사상은 차별의 상이지만 이를 통해 평등을 지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종사가 '수도인이 이 사상만 완전히 떨어지면 곧 부처니라' 했는데, 이를 달리 말하면 부처는 곧 '평등'을 깨닫고 실천하는 분이니, 일체 평등의 시선으로 나와 세상을 보지 못하면 곧 부처가 아닐 것이다. 

/원경고등학교

[2018년 6월29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