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자에 불과한 깨달음의 경지라고 해야 할 것인가. 분명 깨달은 사람의 목소리이다. <휴휴암좌선문>은 중국 임제종의 몽산덕이선사(蒙山德異禪師, 1231-?)가 지은 것이다. 이 글은 경전에 다름 아니다. 사실 팔만대장경에는 부처님의 말씀만이 아니라 계율도 있고, 조사의 어록이 수록되어 있음에도 경이라고 한다. 조사라고 칭하는 분 모두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이은 분들이니 모두 석씨가문(釋氏家門)의 대를 잇고 있는 것이다. 목숨을 걸고 도를 향해 정열을 불태운 분들만이 가능하다. 이 좌선문은 그것을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

2천 5백 년 동안 불교가 걸어온 역사와 사상을 한 마디로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떻게 보면 초세간적이고, 어떻게 보면 지극히 유심(唯心)적인 종교인데 어떤 이유로 인도에서 발원한 후에는 동진(東進)하고, 이제는 서진(西進)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필자의 생각에 딱 한 가지 짚이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왔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종교 또한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다. 더 나아가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 있고, 절망을 희망으로, 불안한 마음을 안심으로, 때로는 기적을 선물하기도 한다. 그런데 불교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마음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외부의 어떠한 힘도 자신의 운명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한다. 모든 업(karma)은 자신이 지은 것이며, 자신이 반드시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것이 종교학에서 말하는 개오(開悟)종교의 특징이다.

불교는 나와 이 세계는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 마음을 알았을 때, 나는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 세계 또한 마찬가지이다. 즉 자신과 인류의 운명을 새롭게 할 수 있다. 불교가 실크로드를 넘어와 중국에 이르렀을 때, 이 마음을 깨닫는 방법은 더욱 고도로 발전했다. 선은 그것을 보여준다. 마음의 대가인 당나라 때 황벽희운선사(黃檗希運禪師, ?~850)는 <전심법요(傳心法要)>에서 제자인 배휴(裵休, 790-870)에게 설한다.

“모든 붓다, 모든 중생은 오직 한마음, 심법(心法)으로 살아간다. 달리 법은 없다. 이 마음은 무시이래로 생성과 소멸이 없으며 푸르거나 누런 것도 아니며 형상도 아니며 유무(有無)에 속하거나 옛것과 새것, 길고 짧음, 크고 작음도 아니다. 모든 명칭과 언어, 계량(計量)과 표현의 한계를 초월하여 그 당체(當體)가 바로 진실이며 사념을 일으킨 즉 차별이 생긴다. 심법은 마치 허공의 끝이 없듯이 가히 헤아릴 수 없다.”(一指 역주)

그렇다. 마음은 잡을 수 없어 어디에도 없지만 어느 곳에도 존재한다. 나는 가끔 불교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이야기 한다. 우리는 빛으로 220만 년 동안을 가야하는 안드로메다 은하에는 도저히 다다를 수 없다. 그러나 그 광속보다도 빠른 것이 있다. 마음이다. 언젠가는 우리 마음이 진화하여 이 지구 안에서도 안드로메다 은하의 생명체와 만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라고. 

재가자인 배휴는 오만했다. 황벽산 대안정사에서 이름을 감추고 살던 희운선사는 청소를 하고 있었다. 마침 이 절을 찾아온 배휴는 불당을 참배하며 불전의 벽화를 감상했다. 그리고 그 곳의 일꾼에게 물었다. 저 그림은 누구의 초상화냐고. 고승의 초상화라고 하자 “영정은 여기있다하지만 고승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되물었다. 그 일꾼은 대답이 막혔다. 배휴가 그렇다면 이 절에는 참선하는 스님이 없는가, 라고 묻자 그 일꾼은 요즘 여기에 와서 허드렛일을 하는 스님이 있긴 한데 그 분이 참선하는 분인 것 같다고 했다.

배휴가 황벽을 찾아뵙자 대단한 분처럼 느껴졌다. 다른 스님들이 말씀을 해주지 않으셔서 아쉬운데 법문 한 말씀 청한다며 앞에서와 같이 “영정은 여기 있다하지만 고승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다시 물었다. 황벽은 큰 소리로 “배휴!”라고 불렀다. 그 소리에 배휴가 대답하자, “그대는 어디 있는가”라고 다시 소리쳤다. 배휴는 그 자리에서 크게 깨닫고 감격에 겨워 그를 스승으로 삼았다. 

다시 독자들에게 묻는다.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하루 아니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왜 그런가. 깨어서 멈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깨어있지 못하기 때문에 주체적으로 살지 못한다.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노예가 되어 있다. 일의 노예, 돈의 노예, 시간의 노예, 심지어는 문명의 노예, 언제까지 노예로 살건가. 인류는 마음의 자유를 잃어 버린지 오래다. 잃어버린 것조차 눈치 채지 못한다. 논리와 경영기법과 프로그램과 시간표에 매달리며, 스스로 만든 그물에 스스로 걸려 허우적댄다. 언제까지 이런 비참한 노예생활을 할 것인가. 황벽이 고함친 것은 배휴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우리 모두에게 소리친 것이다. 스스로 만든 허상에 걸려 발버둥 치며 사는 어리석은 삶을 청산하라고. 

예전에 나는 이 <휴휴암좌선문>을 뜻도 모르고 그저 아침 좌선을 마치면 외기만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그 맛이 더해간다. 우리 마음을 어떻게 이렇게 적실하게 표현했는지. <반야심경>의 제2의 버전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참선인들에는 하나의 지침이자 나침반이다. 

좌는 체(體)요, 선은 용(用)이다. 본질과 현상, 근원과 변화, 구심과 원심 등 무어라 표현해도 좋다. 부모님이 우리가 힘들게 살아도 도둑질하지 말라, 고 했던 그 원초적인 양심, 그리고 살아오면서 느낀 수많은 갈등 두 국면이라고 해도 좋다. 이미 결론은 서두에 나와 있다. 좌의 최고 경지는 지선(至善)이다. <대학(大學)>에서 말하는 사리의 당연한 것으로 최고의 경지를 말한다. 이는 선과 악의 상대성을 뛰어넘은 세계다. 성현들이 도달하고자 했던 곳. 모든 중생들의 저마다의 하소연을 다 들어줄 수 있는 대자비가 발현되는 최고최선의 자리다.

그러기 위해서는 깨어있어야 한다. 그것이 선인 성성(惺惺)이다. 모든 생각이 끊어졌지만 여여하게 만상을 다 비출 수 있는 마음. 태산 같고 대양 같은 마음이다. 모든 빛을 투과시키며, 모든 새들 또한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하늘과 같은 마음이다. 이처럼 깨어있는 마음에서 삶의 지혜가 나온다. 

나머지 좌선문의 내용은 정과 혜가 쌍수 되는 것이다. 두 가지 세계로 나누는 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이다. 휴휴(休休)에 대해 앞의 휴를 마음이라고 해도 좋고, 뒤의 휴를 몸이라고 해도 좋다. 문자 그대로 쉬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제대로 쉬지 못한다. 휴휴는 도를 즐기는 마음이다. 뒤로 물러나 한가하게 도를 즐긴다. 그러나 착각해서는 안 된다. 쉰다는 것은 휴가를 내어 한적한 해변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객진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실체가 없는 먼지와 같은 무수한 번뇌로부터의 해방을 말한다.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 낸 번뇌. 그것이 집착을 낳고, 세상에서 보는 수많은 사건을 만들어 낸다.

현대인들은 삶의 원형으로 돌아가는 리셋이 필요하다. 그리고 내가 대하는 모든 경계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한 순간도 삶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굳이 형식을 따질 필요는 없지만 내가 있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보라. 그리고 배꼽 세치 아래 하단전(下丹田)에 호흡과 마음을 모으고 잃어버린 나를 찾아가라. 이 좌선문을 길잡이 삼아.

/원광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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