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성인들보다 소태산의 독특한 점을 꼽자면 '고향에서 인정받았던 성인(聖人)'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가 고향에서 오랫동안 구도생활을 했고, 대원정각도 이뤘지만 이를 알아볼만한 사람이 있어서 인정받았던 것은 아니다. 육조혜능과 남악회양의 법맥을 이었던 마조도일(馬組道一·709~788)도 막상 고향을 찾았을 때 그의 법력은 알지못하고 어릴적 별명인 '마씨네 키쟁이 코흘리개'만 기억하는 마을사람들처럼 말이다.

소태산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 신심 굳은 아홉 사람을 선택해 첫 조단을 만들고 저축조합운동과 정관평 방언공사를 전개했다. 당시 마을사람들은 '된다, 안된다' 말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소태산은 이를 끝까지 관철시킨 결과 세가지를 얻었다. 혈심혈성의 구인제자, 법인성사를 통한 음부공사 판결, 그리고 마을을 비롯한 인근 고을 사람들로부터의 인심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소태산이 불법연구회로 면모를 바꾸며 새회상 창립에 본격적으로 돌입하는데 중요한 발판이 된다. 그러니까 소태산이 고향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조단구성, 저축조합운동, 정관평 방언공사라는 그 시대와 인심에 맞는 구체적인 행동의 결과였다.

여기서 생각해볼 것이 있다. 소태산의 예견대로 현대는 백여년 전과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 저축조합은 거대한 은행권 시장으로, 일년여 걸쳐 힘겹게 진행한 방언공사는 며칠이면 끝나는 공사로 말이다. 그런데 아직도 바뀌지 않은 한 가지가 있다. 바로 교화단이다.

소태산이 원기2년(1917) 최초 남자수위단을 조직할 때 상황은 농경 시대였다. 도시란 개념은 자리잡기 전이었고, 자발적 인구이동도 거의 드물었다. 아직도 시골에 가면 이사온지 10년차되는 주민은 여전히 외지인으로 치부받을만큼 배타성이 강하다. 반면 마을에는 끈끈한 공동체의식으로 이웃 사촌이상의 유대감이 있어 오래전부터 두레, 향약, 품앗이가 발전했는데 이것이 모두 인맥조직이다. 동학이 처음 조직을 뻗어나갈 때 각지에 접소(接所)를 설치해 우수한 교인을 접주로 임명하고 교인들의 관리·교화를 담당하게 하는 속인제(屬人制)가 가능했던 이유다.

지금처럼 행정단위나 기구 중심이 아닌 인맥중심의 속인제는 소태산이 말한 조단과 닮았다. 소태산은 조단의 장점 가운데 '몇 억만의 많은 수라도 지도할 수 있으나 그 공력은 항상 9인에게만 들이면 되는 간이한 조직'이라 밝힌 대목 때문이다. 구성원이 자주 바뀌면 인맥은 끊어진다. 항상 9인에게만 공력을 들이면 된다는 것은 당시 인구이동이 드물고, 구성원이 바뀌지 않을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을 담보로 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교화단을 부르짖지만 그 실행이 좀처럼 안되는 핵심 원인이 여기 있을지 모른다.

오늘날 저축조합과 방언공사는 잘 이뤄지지 않는다. 시대에 안맞기 때문이다. 아니 훨씬 나은 대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교화단도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해보자.

[2018년 7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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