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혜성 교무] 부릉부릉~ 차 소리가 난다. 택배다! 택배 차는 언제나 반갑다. 버선발로 후다닥 뛰어가던 중, 차에서 내리고 있는 많은 박스를 발견한다. 훈련원 직원들은 박스가 많을 땐 '카트'를 끌고나가, 택배기사와 함께 박스를 나르곤 했다. 나도 '카트'를 끌고 나갔다. '무더운 여름날 기사님이 너무 애쓴다' 생각하며 시원한 음료수 한 병도 챙긴다. 

택배박스를 '카트'에 다 싣자 택배기사가 말한다. "혼자 갈 수 있겠어?" 순간 멈칫한다 '어?? 내가 잘못 들었나? 반말인데? 나한테 지금 반말한 거야?' 심지어 말투도 어린아이에게 쓰는 말투다. "네, 혼자 갈 수 있어요"라고 대답하고 돌아서는데, 기분이 이상하게 나빠진다. 상대는 반말인데, 내가 너무 공손하게 존대를 했다. 그게 더 기분 나쁘다. 물론, 나도 안다. 내가 동안이긴 하다. 우리 집 유전자가 그렇다. 택배기사 눈에 내가 많이, 아주 많이 어려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반말이라니. 이 기사는 예의도 없나!' 마음에 턱 걸린다. 

택배기사의 말을 곱씹으며 사무실로 돌아오다 내 손에 무언가가 들려있음을 발견한다. 음료다. 아까 들고나간, 아직도 차가운 음료다. 가지고 나갔는데, 미처 전해주지 못했다. 아니, 줄 생각도 못했다. 더운 날, 수고한다는 마음은 분명히 있었는데 그 호의마저 사라진 것이다. "아! 가지고 나간 음료도 못 챙겨줄 만큼 나는, 반말에 마음을 빼앗겼구나."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문득 자괴감이 든다. '나는 모르는 사람의 반말 한마디도 소화 못 시키는 사람이구나.'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임하겠다던 결심은 또 그저 결심일 뿐이었다. 낮선 이의 반말 한마디에, 마음이 이다지도 요동치니 말이다. 본디 '나'라는 것은 없으니, '나'에 속지 않는 공부를 한다던 생각도 생각일 뿐이었다. 

듣는 '나'가 없는데, '반말이건 존댓말이건 무슨 상관이냐' 머리로는 알면서, 정작 반말 한마디엔 '나'가 창궐한다. 찬찬히 생각해보자. 택배기사는 나이가 나보다 많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반말이 또 뭐 그리 잘못이겠는가. 더군다나 택배기사의 반말을 번역하면 "혼자 다 들고 갈 수 있겠어요? 내가 같이 들고 가줄까요?"였다. 반말이라는 형식에 속아 택배기사의 진심은 생각지도 않았다. 

소태산 대종사는 "큰 뜻을 세우고 공부하는 사람도 극히 미미한 마음 경계 몇 가지가 비루가 되어 그 발원을 막고 평생사를 그르치게 하나니, 그러므로 공부인은 마음 비루가 오르지 않도록 늘 경계하고 살펴야 하나니라." 그 마음 비루의 예로 '지위와 신용이 드러남을 따라서 자존심이 점점 커나는 일'을 경계했다. (<대종경> 교단품 20장) 

난 반말 한마디도 소화 못하는 사람이었다. 공부인이라면서도 자존심만 점점 커나간 것이다. 마음 비루가 분명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교무님~ 교무님" 위해주니 존중 받는 것에 익숙해졌다. 나이가 어려도 어른처럼 대우해주니, 그게 당연히 내가 받아야 할 것쯤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나 없음을 공부하는 자가, 나를 내세우는 마음만 커진다. 뼈아프게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극히 미미한 마음 경계가 평생사를 그르친다는 말씀, 작은 일이지만 결코 작지 않은 이 일을 마음에 새겨 기억해야겠다. 

/중앙중도훈련원

[2018년 7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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