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염불은 죽음의 순간에 어떤 도움을 줄까. 〈무량수경〉에서 적공으로 아미타불이 된 법장비구가 세운 48원 가운데 제19원에 해답이 있다. 보리심을 일으켜 공덕을 쌓은 임종자가 지극한 마음으로 내 나라에 태어나고자 원하는 데도 부처가 된 자신이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러한 깨달음은 수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 덕분에 우리들은 극락왕생의 티켓을 쥘 수 있게 됐다. 

나아가 〈관무량수경〉에서는 아무리 극악무도한 사람일지라도 임종 시에 열 번의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되면 부처님의 명호를 부른 공덕으로 일순간에 무려 80억 겁 동안 지은 생사의 죄가 소멸된다고 한다. 그 이유는 부처님의 대자비심이다.

소태산 대종사 또한 열반인에게 모든 애착·탐착을 놓고 열반의 때가 오면 "더욱 청정한 정신으로 일체의 사념을 돈망하고 선정 혹은 염불에 의지하여 영혼이 떠나게 하라"고 한다. 이렇게 하면 "평소에 비록 진리에 투철하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능히 악도를 면하고 선도에 돌아오게 되리라"고 설한다. 진리·부처님·불법에 대한 믿음, 불토에 태어나겠다는 서원, 최후 순간의 청정일념은 원불교가 대승불교의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실제 죽음을 맞이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임종 시 정념(正念)을 방해하는 것으로 먼저 육체적인 고통으로 정신의 혼란을 가져오는 단말마(斷末魔)의 고통이 있다. 그리고 미지이자 환원 불가능한 세계로 가는 공포다. 죽음의 연구로 유명한 퀴블러 로스도 〈죽음의 순간〉에서 "죽음의 공포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 뿐 아직도 세계 모든 인간들의 공통된 공포로 존재한다"고 한다.

특히 10-11세기에 활동한 일본의 조사 겐신(源信)은 죽음을 앞두고 권속이나 재산에 대한 착념인 경계애(境界愛), 자신의 신체에 대한 애착인 자체애(自體愛), 내생의 태어남에 너무 집착하는 당생애(當生愛)의 세 가지 경계가 있다고 설명한다. 

대종사가 설하듯 선정과 염불은 이러한 고통과 경계들을 벗어나는 동시에 청정한 마음을 갖게 한다. 그런데 선정은 평소에 수행하지 않은 사람에겐 쉽지 않다. 죽음을 수용하기 위한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은 방법은 염불을 외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임종이 가까워지는 사람들을 도와줄 임종선지식이 필요하다. 우리보다 앞서 믿음이나 수행이 깊은 사람을 보통 선우, 선지식이라고 하는데, 특히 임종을 안내하는 선지식을 필자는 임종선지식이라고 부르고 있다. 

편안한 임종을 위한 환경을 갖추기 위해 최근 국가나 사회단체에서도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예전에 불교는 휴양·정사·승원을 의미하는 비하라(vihara)에서 터미널케어를 행했다. 동아시아의 열반당과 같은 곳이다. 오늘날에는 호스피스병원에서 인간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한 이러한 공간을 더욱 활성화 시키는 한편, 무상한 삶을 정리하고 떠나는 마지막 순간을 지켜줄 전통적인 임종선지식의 역할을 현대적으로 다시 부활시킬 필요가 있다.

즉, 부처님의 대자비심으로 이루어진 염불의 의미를 열반을 맞이하는 사람에게 권하여 스스로 마지막 염불로써 안온한 죽음을 맞이하고, 다음 생에 희망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다. 

/원광대학교

[2018년 7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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