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정도성 도무] 그동안 정신수양을 공부할 때 주로 '정신수양의 요지'를 중심에 뒀고, 그 범위를 더 축소하면 '분별성과 주착심'에 있다. '나누면 분별성, 붙잡으면 주착심', 이런 대응과 대구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으며, '수양'의 의미를 그저 고요한 산중에 기거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정도를 벗어나 일상을 떠나지 않고 생생한 경계 속의 공부로 확장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정신수양 공부가 대체로 '정신수양의 요지'를 통해 용어의 개념을 정리하고 부각시키는데 집중하다 보니 자연히 이어 나오는 '정신수양의 목적'은 잘 다뤄지지 않았다. 

'정신수양의 목적'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욕심'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욕심'이다. 그래서 정신수양은 '욕심'에 대응하는 공부법임을 알 수 있다. '가패신망', '번민 망상', '분심 초려', '자포자기의 염세증', '신경 쇠약자', '실진자', '자살'까지, 오늘날에도 창궐하고 있는 정신적, 사회적 병증과 현상들이 모두 '욕심만 채우려 하다가' 가져온 결과들이다.

그래서 정신수양의 목적이 '천지만엽으로 벌여가는 이 욕심을 제거하고 온전한 정신을 얻어 자주력을 양성하기 위하여'라고 분명하게 '욕심'을 대두시키고 있다. '정신수양의 목적'은 그럼에도 그냥 한 번 읽고 넘어가는 정도로 주목받지 못했다. 

정신수양의 목적이 그러할진대 이제 '욕심'을 연구해야 하지 않을까. 욕심이란 무엇인가? 왜 욕심이 나는가? '욕심, 욕구, 욕망'은 같은가 다른가? '천지만엽'으로 벌여가는 욕심을 '제거'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팔조(八條) 중 사연사조의 '탐욕'과 같은가 다른가? 개교의 동기에 나오는 '물질의 세력'과 '욕심'의 관계는 어떠한가? 개인의 욕심과 사회적 욕심은 무엇이며, 그 관계는 어떠한가? 

<정전> 수행편 7장 무시선법에 나오는 말씀, '아무리 욕심나는 경계를 당할지라도 끝까지 싸우는 정신을 놓지 아니하고 힘써 행한즉'에서 '욕심나는 경계'와 정신수양의 '욕심'은 같은가 다른가? 그렇다면 일상수행의 요법 1조에서 '경계'는 '욕심나는 경계'를 말하는 것이고, 그럴 때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지만 '욕심나는 경계'를 따라 있어진다고 대체할 수 있는가?

정신수양 공부를 하려면 '욕심'을 끄집어 올려야 한다. '욕심 제거'와 '온전한 정신'이라는 명확한 목적을 제시하고 있는데, '욕심'의 문제는 깊이 거론하지 않고, 내 분별성이 무엇이며, 내 주착심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데에만 주안점을 두고 있는 면은 아쉽다. 정신도 수양도, 분별성도 주착심도 모두 '욕심'과 어떤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가를 살펴서 수양의 방향을 잡아야 하고, 그래야 그 목적에 부합하는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내가 가진 욕심을 깊이 들여다봐서 그 욕심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 또한 개인의 욕심과 아울러 사회적 욕심에 대한 인식도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좋은 대학과 출세'라는 '욕심만 채우려 하다가' 우리 사회는 얼마나 많은 고통을 양산하고 있는가. 이런 사회적 고통에 교법적으로 얼마나 대응하고 있는가, 그리고 인간의 사적 욕심에 기반을 두고 있는 자본주의와 정신수양 공부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가도 살펴봐야 할 것이다.

/원경고등학교

[2018년 7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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