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의법향/ 공산 김서학 원로교무

"집에 들면 노복같고, 들에나면 농부같고, 산에가면 목동같이,
그동안 모질게 고생하던 일, 모두 천하농판 같아"

"정말 잘 배우고 싶다면 아는 체 말아야
알고도 모르는 척 할 줄 아는게 겸양지도지"

[원불교신문=정성헌 기자] 시자(尸子)는 권학편에서 '학불권 소이치기야, 교불염 소이치인야(學不倦 所以治己也, 敎不厭 所以治人也)'라 했다. 배우는 데 게으르지 않는 것은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요, 가르치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 것은 남을 다스리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했던 공산 김서학(66·空山 金瑞鶴) 원로교무가 지금도 가슴에 담고 있는 명구다. 교단에 들어와 지난날을 회고하니, 철없이 살던 때 어찌 다행 스승님 한 말씀에 정신차려 보니 지금의 내가 있었다.

아버지의 유산
그가 태어난 곳은 전남 영광군 묘량면 왕촌마을이다. 신앙심 깊은 집안이라 어릴 적부터 할머니에게 '천지영기아심정'을 수차례 들어 아직도 가끔 감로같은 추억이 선하게 떠오를 정도다.
"왕촌교당에서 어렸을 때 많이 놀았어. 법당 밑에 들어가 친구들이랑 숨바꼭질도 하고, 14살때는 교무님께 <철자집>도 배웠지. 교당에서 자면서 종도 치고."

전생에 스님이었을까. 이상하게 어려서부터 파, 마늘, 고기를 안먹었다. 아니 못 먹었다. 불갑사(佛甲寺)가 근거리에 있어 국민학생 시절 6년간 그곳으로 소풍을 갔다. 전생 인연이 있어서인지 스님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집안 아저씨뻘 되는 분이 절을 했지. 교무하면서도 절에 가고 싶은 생각이 나더라고. 나중에 우리 교리를 제대로 알고서 철이 들은 후에 그런 생각이 사라지더만."
삼형제 중 막내였던 그는 지금도 놀지 않고 부지런하는 게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그게 다 농부였던 아버지에게 자연스레 물려받은 것. 그런데 아버지의 유산은 더 있었다.

"당시 양경서 교무가 있을 때였지. 아버지는 교무님이 갑자기 오라고 하면 논에 모심다가도 그대로 가신 분이여. 늘 총부가 우선이라는 말을 하셨어. 공사 구분을 그렇게 하고 사신 분이셨지."

이러한 아버지 성품을 그대로 물려받아 '공사구분'은 그에게 철칙이 됐다. 하지만 당시 일손이 부족해 중학교 진학을 못하고 서당에 다녔는데 <사자소학>, <통학경>, <대학>, <중용>, <맹자> 등을 외우고 익혔다.

수계농원과 만덕산
그는 원기49년 열여덟의 나이로 일찍 출가했다. 수계농원에서 간사생활을 시작한 그는 어릴 때부터 집안 농사일을 도울 정도로 일에 능숙했지만, 매일 쏟아지는 일들을 다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신의를 지킨다는 일념으로 주경야독하며 36개월 근무를 하고 군대에 갔다. 전역을 한 뒤 집에서 잠시 쉬고 있을무렵 다산 김근수 종사가 그를 불렀다.

"다산 종사님도 왕촌 출신이셔. 그래서 출가한 후 한번씩 인사를 드렸지. 다산 종사께서 부르시더니 다시 수계농원으로 가보라 하시더라고. 그런데 수계농원에서 안된다 그래. 교육비 내줄 여력이 없다고. 그 말씀을 드렸더니 만덕산으로 가라고 그러셔."

그는 원기58년 만덕산에서 다시 간사근무를 시작했다. 당시 만덕산도 일이 고되기는 매한가지였다. 다행히 같은해 취임한 양제승 원장 덕분에 어려웠던 만덕산 경제사정도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또 원기56년 박낙천 지부장의 자금투자와 신석태씨의 기술지도로 시작했던 표고버섯 재배도 그 해 1백여 만원의 수입을 올리게 됐다.

"참 일 고되게 하고 살았어. 지금 어떤 일도 무섭지 않게 된 것도 당시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지."

숨어있던 재능
원기59년 영산선원에서 2년 교육과정을 받은 그는 동산선원에 입학한다. 그에게 동산선원에서의 생활은 숨어있던 재능이 드러나는 시기이기도 했다.

원기61년 그가 입학할 당시는 교전, 정기일기, 면접 및 영산선원 학업성적 등 동산선원 입학시험이 처음으로 실시된 해이기도 했다. 같은해 11월27일 동산선원에서 학생자치회 수련단이 주최한 '추심(秋心)의 밤' 문화행사에서 '남기숙사'를 주제로 한 4행시 짓기에서 1학년이었던 그가 장원을 차지했다. 원기64년 동산선원 제16회 졸업식에서는 최우수상(재단 이사장상)을 받았다.
당시 재무부장이었던 정도윤 교무가 중앙중도훈련원에서 졸업훈련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법인사무국으로 데려와 업무를 보게 했다.

"처음에는 사회복지법인 업무를 보다가 재단법인 업무를 보게 됐어. 천하농판이라고 한 대종사님 법문이 떠오르더라고. 집에 들면 노복 같고, 들에나면 농부같고, 산에 가면 목동 같고…. 그동안 농사 짓고, 나무하고, 이제는 사무직을 하니까 딱 그 법문이야."

어릴적부터 한문공부를 손에 놓지 않았던 그는 붓글씨, 펜글씨도 제법 잘 썼다. 주변에 초상이 날 때면 만장(輓章)을 써달라는 요청이 많았다. 만장은 상여꾼들이 맨 상여(喪輿)의 앞이나 뒤에서 들었던 깃발로 망인의 학덕·이력·선행·문장·직위 등에 대한 칭송이나 공덕을 적었다. 또 교단이나 교당의 4축2재가 있을 때 아치(arch) 글씨도 그의 몫이었다.

"지금은 다 놔버리고 살고 있지. 무재주가 상팔자인것 같아. 그래야 오롯이 갈 수 있지."

김서학 원로교무가 평소 수행하는 목탁.

왔다갔다 하지마라
하지만 그는 살면서 휴무를 자주 했다. 빚이 많았기 때문이다. 오락실이 처음 생겼을 때 오락실도 경영해보고, 탁구장도 운영했다. 아버지 재산은 예로부터 장자상속이라 그가 물려받은 건 하나도 없었다. 정토와 함께 남매를 키우면서 어떻게든 살림은 지켜야 했다.

"재무부 살다가 휴무해야겠다고 생각들면 쉬었어. 가세가 어려웠지. 부모유산이 없으니까. 이것저것 하면서 빚을 내면 3년이내 다 갚았어."
그랬다. 손에 쥔게 하나도 없기에 빚이라도 내서 집안살림을 책임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빚을 내고 나면 반드시 몇 년내에 다 갚을 수 있는 길이 그에게는 항상 열렸다.

그가 복직한 뒤, 어느날 삼동원에 주재하는 대산종사를 찾아뵀다.
"대산종사께서 '너 왔다갔다 하지마라' 그러셔. 그때 이제는 안그래야겠구나 싶었지. 그 말씀 들고난 후에 그거 지키느라고 일체 나가지 않고 여기에 계속 살았어."

재무부, 재정산업부에 근무했던 그는 원기95년 신석교당에 부임하게 된다. 처음이자 마지막 교당이었다. 돈에 대한 중압감을 겪은 바 았던 그는 교도들에게 일체 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용금이 부족하면 용금도 안받고 살았다. '지지리 꼽꼽쟁이'란 말을 들을만큼 교당돈 관리에 철저했다. 그렇게 푼돈모아 교당 순수익이 나게 태양광을 설치했고 원기101년 퇴임한다.

학불권 소이치기야
"내가 배우기를 엄청 좋아해. 어렸을 때 많이 못배워서. 지금은 요일마다 공부하러 다녀. 원광대학교에 학술대회나 세미나가 있으면 꼭 참석하고. 그런데 잘 배우려면 절대 아는체 하면 안되는거야. 그래야 사람들이 모르는구나 싶어서 더 잘 가르쳐 주지. 알아도 모르는 척하고 겸손할 줄 아는 것이 겸양지도(謙讓之道)야."

어릴 때부터 손에 놓지 않고 배워온 한문과 글, 그리고 평생 법인행정 업무를 보면서 입법·사법에 관련된 법률 서적을 섭렵했던 그였다. 그러나 배움은 알고 있는 것이 아닌 겸양에 있다는 그의 논리에는 어째서 배움이 자신을 다스리는 길(學不倦 所以治己也)인지 알려주는 묘한 역설이 담겨 있었다.

[2018년 7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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