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혜성 교무] 땡볕아래 말라비틀어진 땅을 맹렬히 호미질 하던 날, 비로소 알게 된다. 팥쥐 엄마는 고약했다. 〈콩쥐팥쥐전〉을 읽으며 가장 이해가 안 된 구절은, 자갈밭을 매라고 한 팥쥐 엄마의 지시였다. 문맥상 괴롭힘 같긴 한데 '자갈밭을 매는 게 왜 괴로울까' 서울태생인 나는 알 방도가 없었다. 출가를 하고나서 비로소 제초작업의 고통도 알게 됐고 콩쥐의 마음도 알게 됐다. 

제초작업은 힘들었다. 제초작업을 하면서 그간 사고도 많이 쳤다. 뭐든 열심히 하는 성미에 풀을 잔뜩 뽑았는데, 누군가 저 쪽에서 달려와 소리를 빽 지른다. "애써 심은 꽃 누가 다 뽑았어!" 나도 할 말은 있다. 뭐가 풀이고 뭐가 꽃인지 이름표가 달려있는 것도 아닌데  내 어찌 알수 있나. 고백하건데, 지금도 잘 모른다.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이렇게 고난이 많던 '나의 제초인생'이지만, 지금은 다행히 싫지 않다. 심지어 훈련원 주변을 산책 하다, 너무 길게 자란 풀이 보이면 잠깐 앉아 뽑기도 한다. 시키지 않아도 말이다. 제초 시간은 여전히 덥고 피로하지만, 도량을 정돈했다는 사실 또한 뿌듯하다. 이제 나도, 제초작업의 악령에서 해방됐나보다 생각했다. 그러다, 한 교무의 일침을 듣는다. 

몇 해 전 훈련생 교무들과 제초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작업시간은 거의 끝나가는데, 제초해야 할 구역은 많이 남은 긴박한 상황이었다. 맹렬한 기세로 풀을 뽑으며 작업지시 하던 중, 한 교무가 말한다.

"혜성교무, 일 한번 독하게 시키네. 총부에선 그렇게 제초작업 싫어하더니, 엄청 열심이야. 안 힘들어?" 나는 쾌활하게 "안 힘들어요!"라고 말했다. 그 교무는 왜냐고 묻는다. "여긴 우리 집이잖아요. 자기 집 치우는 게 뭐가 힘들어요." 그러자 그 교무가 의아하게 다시 묻는다. "아니, 그럼 총부는 남의 집이었어?" 아! 머릿속에 새 한 마리가 지나간다. 말문이 막힌다. 할 말이 없다. 그때의 나와 지금을 비교해보니, 맞다. 내 마음에 총부는 남의 집이었다.

총부에서 매주 하는 봉공작업은 '나의 도량을 내가 정돈하는 것'이 아니라, '재정산업부의 지시에 따라 총부를 정돈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때의 나는 머슴이었다. 남의 일 이었다. 제초작업이라 힘들었다기보다, 남의 일을 해주니 힘들었던 것이다. 

정산종사는 주인으로 사는 사람과 머슴으로 사는 사람을 비교하며 "주인은 모든 일에 앞장을 서며, 자기가 주인이기 때문에 불평이 없으며, 중심 되는 일이나 변두리의 일이나 모든 일꾼들을 다 아끼고 챙기며, 모든 고락을 전체와 같이 하며, 순역 경계를 따라 그 일을 버리지 아니하고 그 성취를 위하여 끝까지 힘쓰나니"라고 법문했다.  (〈정산종사법어〉 권도편 17장) 

주인은 머슴과는 다르다. 자기의 일을 하니 힘들지 않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난 곧잘 생각한다. 하고 있는 일이 힘들 때, '네가 지금 머슴이라 그렇다.' 불평이 생기면 '네가 지금 머슴이라 그렇다.' 지쳐서 할 수 없을 것 같으면 '네가 지금 머슴이라 그렇다'라고. 그러고 나면 신기하게 어려운 마음들이 자취를 감춘다. 지금 주인인가 머슴인가, 마음 한 번의 일인데 결과는 참 무섭다. 이왕이면 주인으로 살자고 늘 다짐해본다.  

/중앙중도훈련원

[2018년 7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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