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의 인제 자작나무 숲.

[원불교신문=김도훈 교도] 이 나무의 모습과 그 이름을 처음으로 서로 연상지을 수 있었을 때, 나무의 아름다운 새하얀 줄기를 보고 사람들이 나무들 품격을 생각하면서 공작, 백작은 아니더라도 자작 정도는 되는 나무라고 해서 붙인 이름인가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선조들은 훨씬 생활에 밀착해서 이 나무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추운 지방에서 잘 견디는 이 나무의 하얀 껍질을 벗겨내면 그 속에 상당히 많은 기름을 함유하고 있어 다양한 용도로 쓰였는데 우선 그 기름기 때문에 물이 잘 스며들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서 눈비에 강한 지붕재로 썼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나무껍질에 불을 지피면 그 타들어 가는 소리가 '자작자작' 난다고 하는데 그 소리에 착안해서 이 이름을 붙였다 하니 얼마나 실천적인 이름입니까? 저는 이런 식의 나무 이름을 참으로 좋아합니다.

나무 이름의 사연과는 별개로 자작나무는 아름다운 그 모습 때문에 문학과 예술 방면에서 곧잘 언급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1970년대 말에 개봉되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닥터 지바고'라는 영화이지요. 추운 나라 러시아의 눈 속에 펼쳐진 이 나무의 숲을 배경으로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사랑과 이별의 장면들은 나무와 눈이 세상을 온통 하얗게 만들어 놓은 모습과 함께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제 친구 하나는 제가 자작나무 이야기를 하자, 정비석 씨의 산정무한이 생각난다고 하면서, "비로봉 동쪽은 아낙네의 살결보다도 흰 자작나무의 수해(樹海)였다. 설자리를 삼가, 구중심처(九重深處)가 아니면 살지 않는 자작나무는 무슨 수중공주(樹中公主)이던가!"라는 구절을 보내 준 바 있습니다.

자작나무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그런지 우리 주변에서도 이 나무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웬만한 공원이나 공공기관의 정원은 물론 아파트 단지의 정원에서도 심심찮게 보이지요. 그렇지만 이 나무들은 그런 곳에서 여러분들에게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고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마치 북극이나 열대 지방 동물들이 우리나라 동물원에 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이 나무가 추위에는 강한 것은 확실한데 더위나 공해에는 그다지 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공원 등에서 만나는 자작나무는 자신이 가진 아름다움의 참모습을 다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결국 자작나무가 자연 속에서 마음껏 자라는 모습을 보려면 몽골, 혹은 시베리아 툰드라 등의 북쪽 지방으로 가야 될지도 모르겠고, 실제로 이 지방에 다녀온 사람들이 그 숲에서 찍어온 멋진 사진들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자연의 모습 그대로 자작나무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이제는 많이 알려진 인제 자작나무숲이죠. 그곳에 늘어서 있는 자작나무들의 모습도 보는 이들의 경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합니다.

그렇지만 인제 자작나무숲에 군락을 이루고 장관을 만들고 있는 자작나무들은 어쩌면 다른 나무들과의 전쟁에서 계속 패하면서 마지막 남은 보루를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느낌이 듭니다. 

이런 감상은 저만의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읽은 나무 관련 책에서 나무학자들도 한라산의 구상나무 군락, 소백산의 주목 군락을 두고 그렇게 표현한 바 있습니다. 우리나라 나무  숲의 대부분은 참나무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나무들이 경쟁력이 뛰어나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이 나무들이 공략을 미루고 있는 곳들이 바로 높은 고산지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인제 자작나무숲은 산길 3.7㎞를 올라야 하는 수고를 해야 비로소 다다르는 곳이기에 보존상태가 좋은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화정교당

[2018년 7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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