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어느 봄날, 기숙사의 선방에서 학생들과 함께 좌선을 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날은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창문 밖의 세상은 어제와는 다른 풍경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이 그대로 있었다. 천지가 이렇게 창조되어 변화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겨우내 마른 나뭇가지에서 푸른 잎이 돋고, 꽃이 피는 이유를 저절로 알 것 같았다. 나와 우주는 하나가 된 느낌이었다. 생사에 대해 자신에게 물었다. 스스로 미소 지었다. 이전과는 다른 기운에 싸여 머릿속 관념의 세계를 탈각하고, 존재 그 자체를 완전히 만끽한 그 때 삶은 온전한 내 것이었다. 

새벽 좌선은 체험을 통해 삶을 새롭게 인식하는 작업이다. 물론 시간에 구애받을 것은 없다. 24시간 중 틈이 날 때, 처해진 곳에 털썩 주저앉아 하단전에 기운을 주하고 호흡을 일치시키면 그곳이 선방이 된다. 선의 궁극은 무시선 무처선이지만 그 기본은 좌선이다. 좌선 삼매를 경험하고 나면 내 삶이 객관화되기도 하고, 집착으로부터의 해방과 동시에 내면의 충일함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따라서 하루 중 입정과 출정의 시간을 반드시 따로 비축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무상한 삶 속에서 참된 주인공으로 살아 갈 수 있다.

좌선은 무엇보다도 일원상의 진리를 체험하고, 그 진리의 삶을 사는 것이다. 구체적인 목표는 견성성불이다. 불교학자 가마다 시게오(鎌田茂雄)는 선은 윤회를 끊어버리는 수행이라고 한다. 현생에서 부처가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미 수많은 부처와 조사들이 그 모범을 보여줬다. 그 경지는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으며, 너와 나가 평등하고, 주관과 객관의 분별이 끊어진 세계다. 나아가 만물은 부처로 이미 화현돼 있다. 그것을 확인하는 일이다.

원리는 진공묘유의 조화다. 무시선법에서 '진공으로 체를 삼고, 묘유로 용을 삼는다'는 말은 이것을 뜻한다. 게송 속의 '유와 무가 구공이나 구공 역시 구족이다'로 귀결된다. 또한 의두 중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와 다르지 않다. 삶 속에서는 〈금강경〉에서 '응하되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의미이다. 좌선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이 순간 이 실존에 일치하는 일이다.

1초에 92억 번이나 진동하는 세슘처럼 요동치는 마음의 근원을 봉쇄함과 동시에 그 에너지를 노복처럼 부려 쓰기 위한 것이다. 들판에 홀로 피는 꽃이 스스로를 뽐내지 않아도 그 존재 자체가 세상에 향기를 내뿜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진공은 무엇인가. 잡을 수 없는 '실체'다. 무상함을 말한다. 영원한 것은 없다. 어떤 존재도 무한한 시간을 통해 나라고 할 수 있는 영원불변한 것은 없는 것이다. 우리가 마음속에 떠올리는 '그것'은 관념일 뿐이다. 묘유는 무엇인가. 지금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이 '실재'를 말한다. 찰라생 찰라멸 하는 이 존재야말로 절대적이며 존귀하다. 이 순간의 만남 그 자체가 오직 한 번의 기회인 것이다.

하나의 존재는 나머지 전 존재가 둘러싸고 있다. 모든 존재는 법신불의 절대은의 덕상(德相)으로 덮여 있다. 진공과 묘유의 우주적 조화를 좌선으로써 내 안에서 확인하는 작업, 이로 인해 내 안의 법신불이 빛을 발하는 것, 그 빛으로 이 세계가 평화의 낙원으로 화하는 것, 그것이 좌선이다. 

/원광대학교

[2018년 7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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