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정도성 도무] 〈대종경〉 성리품 24장에는 당시에 성리 공부하는 장면이 담겨있다. 아마 선기였을 것이다. 선원 대중에게 '만법귀일, 일귀하처'라는 의두를 던지자 대중이 차례로 대답을 올리되 인가하지 않는다. 그러자 한 제자가 일어나 똑같은 질문을 다시 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 제자는 '만법이 본래 완연하여 애당초에 돌아간 바가 없거늘 하나인들 어디로 돌려보낼 필요가 있겠나이까'하고 대답한다. 이에 대종사는 웃기만 했다. 

성리품 18장에는 견성 인가 방식에 대하여 언급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 견성 인가가 어떤 형태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엿볼 수 있다. 성리품 18장에서 동녀 청풍이 백학명 선사로부터 '십삼세각'이라는 견성 인가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 그 모습을 본 대종사는 '견성하는 것이 말에 있지도 아니하고 없지도 아니하나, 앞으로는 그런 방식을 가지고는 견성의 인가를 내리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그런 방식'이란 곧 '말 없는 방식'을 말하며, 이와 같이 격외의 행동으로 성리를 삼아 견성을 인가하는 방식을 경계한 것이다.

그렇다면 대종사는 어떤 방식을 선택했던가. 성리품 전편을 종합해볼 때, 성리는 설(說), 즉 말로 하고, 견성 인가는 주로 문답의 형식을 갖추어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성리와 말의 관계를 보여주는 법문들이다.

'마음은 형체가 없으므로 형상을 가히 볼 수 없다고 하며, 성품은 언어가 끊어졌으므로 말로 가히 할 수 없다고만 한다면 이는 참으로 성품을 본 사람이 아니니', '입만 열면 바로 말할 수 있어야 가히 밝게 불성을 본 사람이라고 하리라'(성리품 6장), '성리를 말로는 다 할 수 없다고 하나 또한 말로도 여실히 나타낼 수 있어야 하나니'(성리품 24장), '근래에 왕왕이 성리를 다루는 사람들이 말 없는 것으로만 해결을 지으려고 하는 수가 많으나 그것이 큰 병이라'(성리품 25장).

이상의 법문을 요약하자면 성리는 말로써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로써 나타낼 수 있어야 하기에 견성 인가의 방식으로 '문답의 방식'을 채택한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눈 내리는 겨울날, 봉래정사에서 '그대들이 그 뜻을 알겠는가'하고 물은 성리품 13장 성리 문답이며, '증득하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의 묻는 말에 대답하여 보라'는 성리품 24장 성리 문답, '허공법계를 완전히 자기 소유로 이전 증명 낸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 성리품 26장 성리 문답과, '심성이기'를 '이 자리에서 말하여 보라'는 성리품 28장 성리 문답까지 모두 그러하다.

성리품 24장에서 제자의 대답에 대종사 웃기만 할뿐 아무 말씀도 인가도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제자의 노력은 가상하나, '필요'와 같은 말을 사용한 걸로 미뤄, 생각으로 그럴 듯하게 지어낼 수 있는 대답이기에 그러했다고 추측해본다. 성리품에서 견성 인가는 삼산 김기천 종사에게만 내려진다. 나머지 법문들은 이처럼 모두 인가하지 않은 장면들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를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교단이 법강항마위 승급을 허락할 때에 대종사가 문답으로 견성을 인가한 전통을 오늘에 되살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진실로 법풍을 진작시킬 수 있게 말이다.

/원경고등학교

[2018년 8월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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