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지은 교무] 누군가의 잘못된 점을 발견했을 때, 그것을 지적해서 말해준다는 것은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가 아랫사람이라고 쉬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조심스럽다. 만일 상대방이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기운만 막히고 불편해질 수 있다는 두려움도 있다.

우리는 가끔 '혼내는 것'과 '화내는 것'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필자도 그런 경험이 있다. 상대방이 한 행동이 정말 잘못된 것이며, 묵과해서는 안되는 중요한 사안이라고 판단해, 바로 질책하듯 따져 물은 적이 있다.

상대방은 반발하듯 전혀 받아들이지 않아 대화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나는 나름 상대방의 명백한 잘못을 '혼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화'를 내며 상대를 비난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 당시에는 그것을 알지 못했었다. 얼마 후 같은 사람과 비슷한 경우가 또 발생했을 때, 이번에는 마음을 챙겨, 상대방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 없이, 내가 느끼고 있는 점,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말을 했다. 상대는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았고, 역시나 그 전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필자는 최대한 내 생각을 전달하고자 했으며, 지난번과 달리, 그에 대한 원망, 답답한 마음은 일지 않았다.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이제 그의 일이라고 생각됐다. 다음날 그가 나에게 찾아와 말하기를, 생각해보니, 본인의 태도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며, 내가 했던 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처음과는 놀랍도록 달라진 태도를 보며,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참 미묘하여 기운이 귀신같이 통한다는 것을 느꼈다.

혼내면서 마음에 아무런 앙금이 남지 않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혼내는 중에 언성과 함께 감정이 점점 올라오는 경우도 있다. 마음을 챙기고 챙겨서 해도 쉽지 않은데, 그 마음에 아무런 흔적이 없이 혼을 낸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대종사 하루는 한 제자를 크게 꾸짖으시더니 조금 후에 그 제자가 오자 바로 자비한 성안으로 대했다. 옆에 있던 제자가 의아하여 여쭤보자, "아까는 그가 끄리고 있는 사심을 부수기 위하여 그러하였고, 이제는 그가 돌이킨 정심을 북돋기 위하여 이러하노라"라고 말했다.

소태산 대종사가 성인이라 하여 언제나 담담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화를 낼 때는 화를 냈고, 기뻐할 때는 기뻐했으며, 아끼는 제자들이 열반할 때는 슬퍼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 감정에 흔적이 없었다. 법위등급 중 최고의 경지인 대각여래위는 '동하여도 분별에 착이 없고 정하여도 분별이 절도에 맞는' 경지이다. 동하여도 분별에 착이 없다는 것은, 마음에 희로애락의 감정이 동하되, 거기에 집착하여 끌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할때, 그의 앞길을 생각해주는 마음에서 말을 한다면 '혼낸다'고 할 수 있겠지만, 꼴을 못 봐주는 마음으로 나무라면, 화를 낸다 할 것이다. 그 기운의 차이는 상대방이 먼저 귀신같이 감지한다. 받아들이는 사람입장에서야, 이러나 저러나 본인의 부족한 점을 돌아보는 감사한 기회로 알고 받아들여야겠지만, 지도인의 입장에서는 내가 과연 감정적으로 화를 내고 있는 것인지, 상대방의 앞길을 위해 혼내고 있는 것 아닌지 내 마음을 살펴야 할 것이다.

/미주총부법인

[2018년 8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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