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산 서경범 원로덕무

[원불교신문=정성헌 기자] 거산 서경범(76·車山 徐敬範) 원로덕무. 그는 영광 법성면 발막마을에서 태어났다. 앞집에는 육촌간인 서대인 종사가 살았는데 소태산 대종사 인연으로 총부로 갈 적에 그의 형인 서성범 교무도 수학하러 함께 올라갔다. 당시 서대인 종사를 따라 올라갔으면 지금은 어떻게 됐을까. 하지만 그는 어머니를 여의고 혼자 계시는 아버지와 동생들을 돌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택시운전사
그는 군대 갈 나이가 되자마자 지원입대해 수송학교에 들어갔다. 형님이 고생한다고 만류했음에도 그는 운전을 배우기로 한 것이다. 이후 그는 퇴임할 때까지 교통사고 난 적이 한번도 없는 경이로운 기록을 갖는다.

군대 제대 후, 그는 배운 운전 실력으로 광주에서 5년간 택시운전사를 한다. 어려운 가정살림에 보태겠다고 시작한 첫 직업이었지만, 천성이 선량한 그에게 견디기 힘든 경계가 있었다. 당시에는 택시에 미터기가 없는 때라 요금을 운전자 가늠으로 정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보니 택시기사들은 손님들에게 바가지 요금을 씌우거나 먼 길로 돌아서 가는 등 속이는 장사가 유행할 수 밖에 없었다. 주위에서는 그렇게 돈을 버는데 그는 마음을 불량하게 먹을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그는 가슴아픈 사연을 당한다.

하루는 차주가 면허증도 없이 전남 보성으로 택시를 이끌고 가버렸다. 돌아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으니 그는 초조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회사에서 영업부장과 함께 사고 현장을 향했다. 현장에 이르니 사고난 택시가 보였지만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환자들은 다행히 화순병원으로 이송돼 입원치료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같이 왔던 영업부장이 그에게 말을 건넸다.

"자네가 운전했다고 그려. 면허증 없이 택시 운전했다는 사실을 알면 회사에서 책임져야 해. 징역 살 일은 없으니까 걱정마."

갈등이 심했다. 착하기만 했던 그는 현장조사하러 나온 경찰이 '기사가 누구여?'하는 말에 본인이라고 대답해버렸다. 그는 결국 짓지도 않은 죄목으로 40일간 면허정지, 벌금 만원이 내려졌다. 당시 택시기사가 한달 열심히 일해야 6천원 벌던 시절이었다. 택시회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마음의 상처와 경제적 손실을 모두 그가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약속시간은 철저히
택시업을 그만두고 전전긍긍하던 차에 어느 임원차를 운전하는 기사가 찾아왔다. 택시운전을 하면서 알던 사이다.
"서 선생. 나 일주일정도만 휴가 다녀올란디 차 운전 좀 해줘."

다행이었다. 그렇게 일주일 일을 하고 나왔는데 얼마있다가 전화가 왔다. 그 회사 기사가 그만둬 운전자를 구하고 있단다. 그가 일주일동안 타고난 성실성으로 운전했던 그곳이었다. 그것이 인연이 돼 그는 5년을 운전하게 된다.

하루는 삼양타이어 직원들이 궁금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서 선생님은 어떻게 전무님을 모시간데 아무 말씀도 안 하시네요? 다른 기사들은 석달을 못 채우고 나갔는데요."

그 기사가 그만둔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그는 "저는 약속시간은 철저합니다. 항상 10분 전에 모시러 가요"라고 말했다. 전무가 그를 눈여겨 본 것은 그가 약속만 잘 지켜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제사공장(製絲工場)이 한창 붐이었다. 누에고치를 키워 명주실을 뽑아 일본에 수출하면 돈이 제법이었던 때다. 때문에 누에고치를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큰 관건이었다. 그는 전무를 모시고 강원도 춘천 등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경미한 사고 한번 난 적이 없이 차분하게 운전을 해 스케줄에 지장을 준 적이 없었다. 또 당시는 비포장도로가 많았지만 어찌나 얌전히 운전을 하던지 전무 마음에 쏙 들었던 것이다. 5년이 지나자 그가 불쑥 사표를 냈다. 계속 운전하고 살 수는 없을 것 같아서다. 회사에서는 깜짝놀라 회유하려 했으나 그는 잠적해버렸다.

대종사님도 다음생에 정남하신단다
그가 잠시 앞날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서대인 종사 지시로 서성범 교무가 왔다. 익산으로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형님이 먼저 가있는 총부에 같이 가자고 하니 그런가보다 하고 따라나선 것이다. 서대인 종사에게 먼저 문안을 올리고 조실로 향했다.

대산종법사는 그를 보자 대뜸 "네가 내 차를 몰러 왔냐"고 물었다. 그는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어르신이 물으시니 "예"라고 답했다. 당시 조실에서는 종법사 승용차가 없어 있는 집 교도 차를 빌려 타고 다녔다. 그가 조실에 올 즈음 처음으로 종법사 전용차를 들이고 있을 때였다.

처음에 그는 임원차를 운전했던 것처럼 출퇴근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대산종법사는 봄에는 원평, 여름에는 완도, 가을에는 만덕산, 겨울에는 신도안을 다니며 머물렀다. 익산에 정착하고 네 자녀를 거둔 그는 집안을 돌볼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사회생활하다 이제 막 들어온 그가 이곳 일과를 그대로 따르다보니 어느날부턴가 소화불량에 걸려 항상 콜라를 박스 채 사다가 먹었다. 어느 날은 대산종법사를 모시고 진주교당 봉불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먹은 음식으로 식중독이 걸려 크게 혼이 난 적도 있었다. 이래저래 고생고생하다 보니 기운도 없고 수척해졌다.

그것을 본 대산종법사가 걱정스런 마음에 "둘이만 같이 산책가자"고 했다. 한참 걷다가 대산종법사는 뒤따라오는 그에게 "경범아. 나한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한번 해봐라"하고 물었다. 뜨끔했다. 그의 속을 알고 물어보시는 것 같았다.

그가 "종법사님 제가 요즘 사가에 끌려서 도저히 먹어도 소화가 안됩니다"하고 말씀드리니, 대산종법사는 웃으며 말했다. "대종사님도 다음생에는 정남을 하신다 했다. 부처님도 그렇게 끌리시는데 이제 들어온 네가 어떻게 사가에 안 끌릴 수 있겠느냐. 딱 3년만 참아봐라."

프린트나 복사기가 없던 시절, 그는 동산 이병은 종사를 대신해 대산종법사 법문을 수기하며 시봉했다.

법문 쓰는 운전사
당시 법무실장으로 이병은 교무가 대산종법사를 보필했다. 이병은 교무가 열반하기 넉 달 전에 그에게 전국일주 한번 하자고 부탁했다. 그때가 겨울이었다. 대산종법사는 겨울철이라 차를 이용하지 않으셨기에 허락을 받고 길을 떠났다. 서울로, 부산으로, 경상도로, 전라도로 웬만한 교당은 다 들렸다. 이병은 교무는 현장에서 고생하는 교무들을 챙기고 격려했다. 그해 봄 이병은 교무는 대산종법사를 모시고 영산성지를 갔다. 보통 이병은 교무가 대산종법사를 모시고 영산에 들어가면 짧게는 보름, 길게는 한 달간 머물었는데 얼마 안 있다가 신도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갑자기 열반했다.

그에게 그러한 슬픔도 잠시, 대산종법사는 그를 불러 "야, 경범아. 동산 대신 네가 법문을 좀 써라"고 하명했다. 어쩔 수 없이 "예" 대답했다. 남몰래 열심히 글씨연습을 했다. 물론 어릴 적 서당을 다니면서 천자문, 명심보감, 소학을 떼고 글씨도 제법 쓴다고 여러 소리 들었지만 펜을 놓은 지 오래 돼도 한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대산종법사의 웬만한 법문은 모두 그의 작품이었다. 교도들이 찾아올 때 한 장씩 내드린 법문, 차트를 만들어 한 장씩 젖히며 교리를 설명하는 법문 등 쉼없이 글씨를 써 올렸다.

죽을 때까지 열심히
법무실과 시무실, 사회복지법인 삼동회, 영모원을 거쳐 원기96년 퇴임한 그는 이제 기도생활에 전력한다. 아침마다 4시에 일어나 방에 모신 법신불 사은과 소태산 대종사, 정산종사, 대산종사, 부모님 사진에 절부터 올린다. 대산종사가 밝힌 기원문 결어를 조석으로 외우며 함께 읽은 교전봉독이 어느새 십수 번이다.

"내가 지금까지 사고 한번 안 나고, 큰 스승님들 곁에서 모시며 법문 쓴 인연이 다 사은님 덕분이지. 사람 마음이 소 길들이는 것과 같다고 한 말씀이 딱 맞어. 앞으로 죽을 때까지 열심히 정진해야지. 열심히."

[2018년 8월24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