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 / 서울교구 영등포교당 정효경 교도
우아·영등포교당 봉공회장 11년 거쳐 교도회장
바리스타·수행식단·합창 참여로 풍성한 노후

[원불교신문=민소연 기자] 차향이나 연꽃향, 대향, 초향 등등 신앙의 향기에도 여러 갈래가 있다. 공부, 마음, 수행 등 다양한 모습에서 하나로 어우러지는 저마다의 향기. 그렇다면 그의 향기는 여름 오솔길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미풍의 그것이다. 먼저 나서지 않으며, 다만 반발자국 뒤서거니 한 믿음직한 도반. 무더위 속에서도 청량하며 순하게 끌어안는 바람의 향기. 영등포교당 효타원 정효경 (孝陀圓 鄭孝敬) 교도회장과의 시간이 그랬다.

최근 교당 불사 1천일기도를 해제했다는 그를 찾아 교당으로 향했다. 여유로운 인터뷰를 기대했는데 웬걸, 바쁘게 닭을 삶고 있는 정효경 교도. 법인기도에 참석한 교도들과 함께할 점심 준비다.

"지난해 새 건물로 온 후 기도 오시는 교도님들과 매일 점심을 함께 했어요. 아닌게 아니라 해제식 하고는 좀 허전했는데, 마침 법인기도 동안 나누게 됐네요." 매일 열명 안팎의 점심을 준비했던 그. 한 집안 한 솥밥 먹듯 자연스러웠고 다들 손 보태고 먹거리 들고 오니 수고인줄도 몰랐다. 

"올해 교도회장이 되기 전 교당 봉공회장을 했었어요. 전주 우아교당에서 두 번에 7년, 영등포에 와서 4년했으니 총 11년 했네요. 그러다보니 교당 부엌이 익숙하고 교무님 교도님 식사 준비하는 게 내 일인 것 같지요."

공양을 위해 소리도 없이 불앞에서 땀흘려온 정효경 교도. 원기61년 결혼하자마자 시어머니 이순적화 교도를 따라 남원교당에서 입교했던 그는 일원가족이던 시집 분위기를 두말없이 따랐다. 

"교무님들이 우리집에 자주 들락날락하시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좋았어요. 그러다 우아교당으로 와서 아이들과 함께 다니면서 마음을 붙였죠."

당시 초창기였던 우아교당엔 교도가 열댓명 뿐이라, 아이 셋을 데리고 온 40대 젊은 엄마는 적잖이 예쁨을 받았다. 그 결과 맡게 된 자리가 봉공회장이었다.

"교당 지으려 뭘 할까 고민했거든요. 청국장을 하자 싶었는데, 당시 집도 작고 부엌도 없어서 할 데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한 교도 친정까지 가서 콩을 삶고 띄웠어요. 거기마저 여의치 않을 땐 각자 집에 콩을 나눠주고 삶아 오라고 했다니까요. 그렇게 어렵게 띄워서 내린 청국장이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지요."

장터에 내다 팔았던 청국장 인기가 얼마나 좋았던지, 당시 콩 너댓 가마를 삶고도 간당간당했다. 그렇게 한번 하고 나면 500만원은 마련해 보탤 수 있었다는 그. 

"이전하고는 청국장 방을 따로 마련하기도 했었어요. 내 장사가 아니라 교당 올리는 일이니 할 수 있었지요. 피곤한 줄도 몰랐던 그 때의 추억이 지금도 두고두고 힘이 돼요."

그랬던 그가 영등포로 온 것은 원기93년 남편 박신근 교도의 퇴직으로 자녀들이 있는 서울로 상경하면서였다. 오자마자 유흥가 한복판의 2층 교당이 안타까웠다는 그. "집에서 교당 오가는 동안 빈 집만 있으면 이사가자 싶어 알아봤었어요. 모든 교도가 그렇게나 한마음으로 바랐는데, 정상덕 교무님을 거쳐 임성윤 교무님 때 현실이 된 거죠."

쉽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된다는 믿음으로 결국 이뤄낸 교당 이전. 그 가운데 평생 소원도 이뤘다. 그 어렵다는 뒤늦은 남편교화에 성공한 것이다.

"늘 퇴직하면 다니겠다고 했는데 서울에 와서도 드문드문했었어요. 그러다, 교당 이전할 때 교무님과 발 동동거리는 모습을 보다못해 팔을 걷어부치더라고요."

아닌게 아니라 점심 설거지며 뒷정리, 바닥 쓸고 닦기 등 인터뷰 내내 쉬지도 않고 교당일을 돕던 이가 알고보니 남편 박 교도였다. 인생의 동반자인 남편이 교당에 마음 붙인 법동지가 되니 그저 감사하다는 그.

"이전하고 교당에 새로운 활력들이 많이 생겼어요. 1층 공간에 바리스타 자격증반도 열렸고, 수행음식 클래스도 열렸지요. 교당일이니 합력한다는 차원에서 시작했는데 삶의 또다른 즐거움이 됐어요."

이 밖에도 초공예나 박진성 교도 연꽃사진전 등 다양한 문화적 시도 덕에 한층 젊어지는 것 같다는 그. 얼마전부터는, 교당 대각전에서 연습하는 서울원음합창단에도 합류해 함께 하고 있다. 
"교당은 신앙도 신앙이지만 노후의 즐거움과 보람의 의미도 커요. 교당만 나와도 다양한 연령층을 만나 관계를 맺고 이어가게 되죠. 나이들면 외로움을 느끼지만, 교당에 오면 그럴 틈이 없어요. 게다가 다양한 문화를 접하며 노후가 풍성해지니 이런 곳이 또 어디 있겠어요."

그런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는 얼마전 끝난 1천일기도를 거의 빠지지 않고 챙겼다. 그 사이 교당도 옮기고 남편교화도 이루고 회장도 됐다. 이제는 회장으로서의 역할을 위해 공부 고삐를 다시 쥐었다는 그의 신앙은 여전히 진행형. 조용조용 두런두런한 그를 두고 '신앙과 수행이 고요히 스민 교도'라 평하던 임성윤 교무의 말이 한가닥 바람처럼 시원했다.          

[2018년 8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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