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점 해결 위한 허심탄회한 대화 필요
강자와 지도인이 먼저 변해야 한다

[원불교신문=허인성 교도] 나는 중학교 2학년 부처님과 함께 살고 있다. 아이들 키우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요즘 많이 느끼는 중이다. 바르게, 곧게, 건강하게 키우고 싶지만 불가능한 꿈을 꾸고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나도 어렸을 때 부모님 속을 이렇게 썩였을까? 계획 세우고 공부해라. 계획 세우고 공부했어요. 스마트폰 통제해라. 스마트폰 통제하며 쓰고 있어요. 건강이 최고다. 공부만 하라면 서요. 책 좀 많이 읽어라. 학원숙제 하기도 벅차요. 어떤 말을 해도 둘의 사이가 좁혀지지 않는다. 이 일을 어찌할꼬.

이렇게 해라 하면 딱 이렇게만 하고, 저렇게 하지 말라 하면 딱 저렇게만 하지 않는다. 말을 잘 듣는 것 같으나 겉으로만 그럴 뿐 속은 반대다. 부모는 성에 안 차고, 자식은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 전까지 말을 잘 듣던 아이가 갑자기 달라지니 당황스럽다. 생각하는 것은 초등학생 수준인데 다 컸다며 소리를 지른다. 

이것은 누구나 겪는 과정 중의 하나이다. 이 시기를 어떻게 슬기롭게, 큰 탈 없이 극복해 나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아직은 아이라서 본인 스스로가 약속한 것도 지키기 힘든 나이 아닌가. 지나고 나면 그 행동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었는지 깨닫는다. 때로는 방황도 하지만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하기도 한다. 자신의 아이가 그 길을 걷고 있는 것을 보면서 어느 부모가 도와주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서로의 근기가 다르다. 입장도 다르고, 처한 상황도 다르다. 부모는 자식을 다 알 것 같지만 다 모른다. 자식도 그런 부모가 답답하고, 통제하려고만 하는 것에 화가 난다. 서로의 골이 더 깊어지고, 결국은 집을 나가거나 누구 하나 쓰러지는 꼴을 겪고 만다. 그것을 원한 것은 아닐 것이리라. 누구나 원만히 일을 처리하고 싶고, 더 사랑하고, 더 행복하고 싶어한다. 그런데도 마음대로 안된다. 이것도 인과일까?

어르신들은 아이가 거짓말을 하면 알면서도 속아주고, 하기 싫다고 하면 아무리 좋은 것도 억지로 시키지 말라 한다. 긴 인생을 살고 보니 그 시기는 잠시 지나가는 순간일 뿐이라 생각하셨으리라.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런 것을 놓친 채 공부해라, 책 읽어라, 정신을 차려라 주장한들 그것이 올바른 가르침이겠는가.

아이 하나와의 관계에서도 이런 말못할 고민이 많은데 석가모니 부처나 소태산 대종사는 어떠했을까?

아무것도 아닌 일에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며, 둘이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고 아웅다웅 싸우는 모습이나, 갖은 술수를 써가며 서로 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들을 보며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정작 중요한 것은 탐·진·치에 눈이 멀어진 자신을 깨닫는 것이며, 어서 삼대력을 길러 자신의 업을 스스로 지어가며 생사를 초월한 자유를 얻게 하고 싶었으리라. 그 말씀을 제자들과 경전에 다 남겨놓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말씀을 잘 받드는 이가 많지 않다. 우리가 그 사춘기 아이들과 다를 것이 뭐가 있겠는가.

우리가 아이를 가르침에 있어 일방적인 지도나 지시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떤 문제든 해결을 위해서는 그 상황을 직시해야 하며, 근본 원인을 찾고, 현실에 맞는 해결책이 제시돼야 한다. 아이를 가르침에 있어서는 현 상황을 서로가 인정하고, 불신과 불화의 원인이 됐던 오해와 실수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속마음을 다 드러내는 대화가 필요하다. 서로가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 난 사이가 아니기에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부모가 먼저 변해야 한다. 또한 이 세상의 수많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현 상황을 서로가 인정하고, 불신과 불화의 원인이 됐던 오해와 실수에 대해 허심탄회한 대화가 필요하다. 서로가 죽이기 위해 존재하는 사이가 아니라 서로가 도와야만 같이 살 수 있는 사이이기에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내가 먼저 변해야 한다. 강자가 먼저 변해야 하고, 지도인이 먼저 변해야 한다. 

단, 주의할 점이 있다. 허심탄회한 대화에서는 숨김이 없어야 한다. 뒷주머니에 뭔가 숨긴 채 상대를 이기려는 술책을 쓰는 것은 탐·진·치에 눈이 먼 중생일 뿐이다. 그저 파란고해의 일체생령으로서 평생을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정릉교당

[2018년 8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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