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혜성 교무] 수능 날 아침, 어머니는 "먹고 싶은 건 뭐든 말해. 도시락 싸줄게"라고 말씀했었다. 전복이라도 구워 넣어줄 기세였다. 수능 날,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응원은 도시락을 싸주는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물음이 무색하게 나의 대답은 뻔했다. "비엔나소시지요." 그럴 줄 알았단다. 나의 일관성이 이 정도다. 좋아하는 음식이 무어냐 물으면 기계 같은 대답이 나온다. "비엔나소시지." 

이렇듯, 누구나 선호하는 음식이 있다. 그리고 상대가 무얼 좋아하는지는, 함께 지낸 세월의 크기만큼 알아챌 수 있다. 특히 훈련원처럼 자율배식을 기본으로 하면, 선호도를 모를 수 없다. 좋아하는 음식은 더 많이 담아오고, 안 먹는 음식은 담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 또 하나의 미스터리가 발생한다. 원장님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몇 년을 지켜보았는데도 말이다. 오늘은 반찬의 가지 수가 많아, 원장님 식판엔 반찬이 가득하다. 원장님은 반찬이 3가지면 3가지, 5가지면 5가지 모두 담아온다. 특식은 많이 담고 자주 나오는 멸치는 안 담아도 될 텐데, 원장님은 그러지도 않는다. 반찬이 식판에서 공평을 이룬다. 처음엔 단순히 편식을 하지 않는 어른으로 생각했다. 다음엔 음식을 해주시는 분의 정성과 노고를 염두 하는 자비심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만 간주하기에는 부족한, 무언가 기계적인 공평함이 음식에게 작동함을 발견한다. '먹고 싶은 것만 담아오는 나의 식판'과 '간택하는 마음 없이 담아 오는 어른의 식판'이 대비 되어 문득,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원장님은 좋아하는 음식이 없으실까?' 기계적으로 균형을 맞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공평한 식판을 보며 '아! 이것이 부처의 차제걸이구나!' 하는 울림이 든다. 

차제걸이는 부처의 탁발원칙이다. 탁발을 시작한 집부터 차례로 일곱째 집까지 탁발하며, 얻은 것 없어도 더 이상 탁발을 하지 않는 원칙. 

잠깐 부처에게 빙의해보면 그렇다. 부잣집만 골라 탁발을 하면 더 귀한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인심이 후한 집만 탁발을 하면 성공률이 높을 것이다. 난 아마 소시지를 주로 주는 집 앞에서 매일 탁발 하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차제걸이는 싫어하는 음식을 주던, 상한 음식을 주던, 음식을 아예 주지 않던 '상관없이' 탁발하는 것이다. 분별하고 고르지 않는 마음이다. 간택하지 않는 마음이다. 다만 주어진 대로 받아들임이다. 주어진 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 없음'을 공부하는 가장 요긴한 방법이 된다.  

대종사는 "사람이 밥 하나 먹고 말 한 마디 하는 데에도 공부가 있다"며 "공부하는 사람은 무슨 일을 당하든지 공부할 기회가 이르렀다 하여 그 일 그 일을 잘 처리하는 것으로 재미를 삼나니 그대도 이 공부에 뜻을 두라"고 법문했다. (〈대종경〉 수행품 32장) 

밥에도 공부가 있다. 다시 원장님의 식판을 본다. 그리고 나의 식판을 본다. 오늘 아침에도 소시지를 많이 담아왔다. 여전히 좋아하는 음식에 사족을 못 쓰는 부족한 나지만,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 생겼다. 무념했음을 또 공부한다. 

/중앙중도훈련원

[2018년 8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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