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선림의 규범을 최초로 제정한 사람은 당나라의 백장회해이다. 소위 〈백장청규〉가 그것이다. 이를 근거로 남송의 자각종색은 〈좌선의〉를 지었다. 이보다 앞서 단전주를 비롯한 좌선법을 설한 천태지의의 〈수습지관좌선법요〉도 빠질 수 없다. 오직 좌선만이 불성을 드러낼 수 있다고 설한, 일본 중세의 도겐 또한 〈보권좌선의〉로써 좌선의 방법을 설했다. 이 외에도 여러 선사들의 좌선법이 있다. 원불교 좌선법은 이 조사들의 전통적인 방법을 계승하고 있다. 

그런데 좌선의 궁극적인 세계를 밝힌 것으로는 원나라 몽산덕이의 '휴휴암좌선문'이 있다. 물론 선사들의 설법은 깨달음을 설하므로 모든 법문들이 근본적으로는 이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이 휴휴암좌선문을 원불교에서는 좌선의 말미에 외고 있다. 몽산덕이는 자신의 수행처를 휴휴암이라 이름하고, 그곳에서 선풍을 드날렸다. 그는 무자(無字) 화두를 드는 간화참구의 철저한 수행으로 깨달음에 이르렀다. 이 좌선문은 한마디로 '좌선은 무엇인가'라는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것은 정과 혜가 둘이 아닌 가운데 공적영지의 광명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 좌와 선의 의미를 체용으로 나누어 무한대로 확장하고 있다. 최종적으로는 적적성성하고 성성적적한, 불성이 현현한 상태에 이르도록 하고 있다. 쉬고 또 쉰다는 휴휴는 모든 번뇌 즉, 탐·진·치를 쉬고 쉬어서 마침내 대해탈의 자유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가 번뇌망상을 쉬게 되면, 따로 자리 잡고 앉아서 좌선을 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처럼 진실한 내적 경험 없이 자리의 유무를 따지는 것은 삼가 해야 한다. 깊은 삼매를 경험해 보지 않고, 이 객진번뇌를 탈각했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미망과 고통, 현상과 본질의 이원세계, 개인과 집단의 분열증, 모순과 부조리를 느끼는 감각 등이 좌선을 통해 몰아(沒我)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는 타파될 수 없다. 

이 현실을 좌선 속에서 무너뜨림으로써, 자신의 업장과 세계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태산같이 확고한 객관의 힘을 획득하는 것이 좌선이다. 경허스님은 암자에서 좌선을 하는 중에 문지방에 손이 끼여 피가 흐르는 것도 모르고 입정삼매에 들기도 했다. 

한편, 이 좌선문은 원불교의 교의와 상통하는, 불교를 기반으로 유교와 도교를 수용하는 회통의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지선(至善)은 〈대학〉의 명명덕(明明德)·신민(新民)·지어지선(止於至善)의 삼강령의 하나에 해당한다. 지선은 선과 악을 초월한 절대선의 경지를 말한다. 

또한, "보아도 보이지 아니하고, 들어도 들리지 아니하며, 공이로되 공도 아니요, 유로되 유도 아니라"는 내용은 〈도덕경〉의 내용과 같다. 도기(道紀, 도의 벼리)장에서, "도는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아 이(夷, 색이 없는 것)라 하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아 희(希, 소리 없는 것)라 하며,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어 미(微, 형체가 없는 것)라 한다. 따라서 이 셋이 합하여 하나가 된다"고 한다. 

결국 좌선은 이처럼 동아시아 도학의 핵심 세계를 관통하는 수행법이다. 배를 육지로 끌어 올리는 우렁찬 한 소리 후에, 앉은 대지를 박차고 뛰어오르는 대오(大悟)의 몸짓은 잠자는 우주를 깨우는 희열에 다름이 아닐 것이다.

/원광대학교

[2018년 8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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