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혜성 교무] 훈련원 앞의 벚나무들이 이제 고목이 돼, 벌써부터 낙엽이 떨어진다. 꽃도 예전엔 더 풍성했다던데, 지난봄에는 해성했다. 저 나무들도 창창하던 시절이 있었을 텐데, 문득 늙음이 애잔하다. 하지만 애잔을 다 느끼기도 전에, 옛 기억이 떠오르며 마음을 멈춘다. 

애잔한 것은 저 나무가 아니다. '나무'는 스스로를 애잔해하지 않는다. 그것을 '보는 나'가 끼어들어 '애잔'이란 단어를 만들었을 뿐이다. 변화 안에서 자연은 있는 그대로 그러한데, 변화를 거부하는 '인간의 번뇌'가 작동한 거다. 오래전 반려견을 통해, 이 사실을 크게 느꼈다. 

우리 집엔 매끈하고 영리한 슈나우저가 있었다. 모두의 기쁨이던 녀석은 어느 날 눈이 멀었다. 동생이 알려준다. "언니, 강아지 콧잔등 좀 봐. 상처가 많지? 안보이니까 코로 부딪히며 걸어 다니고 있어. 다 그 상처야" 콧잔등엔 크고 작은 상처가 정말 많았다. 마음이 아팠다. 늙고 아픈 것도 당연한 것 일텐데, 나는 그날 강아지를 부여잡고 울어야 했다.

'얼마나 힘드니, 얼마나 불편하니, 얼마나 답답하니.' 갑자기 눈이 안보이면 얼마나 끔찍할까. 사는 것이 버거워 보이는 녀석을 부여잡고 펑펑 울고 있는데, 정신을 차리니 이 녀석은 꼬리를 치고 있다. 저 쪽에서 동생이 간식을 주겠다고, 이름을 부르자 냉큼 그쪽으로 걸어간다. 물론 여전히 코를 무기삼아, 걸어가긴 하나 '이미 지형지물이 익숙해 졌는지' 거침없이 나아가 간식을 먹는다. 또 그 앞에 앉아 꼬리를 치고 있다. 

"어? 나는 슬픈데, 강아지는 슬프지 않나?" 나는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불편한데, 강아지는 별 상관이 없는 것 같다. 멀쩡히 나아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 슬픔은 그냥 '나의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나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나의 관점'에서 슬퍼하는 것뿐이다. 이 녀석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자신의 삶을 훨씬 잘 받아 들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처음부터 슬프고 절망스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아픔은 내가 만든 슬픔과 연민이지, 강아지와는 결코 상관이 없음을 발견한다. 그래서 자연은 자연이다. 자연 안에서 모든 늙음과 죽음은 자연스럽지만, 인간만이 부자연스럽다. 오늘도 어느 길가에 꽃은 죽었을 것이고 저 숲의 고라니도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다. 

대종사는 인과의 이치에 따른 변화를 설명하며 "이 이치를 아는 사람은 그 변화를 겪을 때에 수양의 마음이 여여하여 천지와 같이 심상하나, 이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그 변화에 마음까지 따라 흔들려서 기쁘고 슬픈 데와 괴롭고 즐거운 데에 매양 중도를 잡지 못하므로 고해가 한이 없나니라"고 법문했다. (〈대종경〉 인과품 6장) 

변화하는 이치를 아는 사람은 천지와 같이 심상하다. 자연은 대수롭지 않게 변화를 받아들인다. 늙고 병들고 죽는 것에 인간만큼 번뇌가 많은 생명체가 또 있을까. 변화를 받아들이는 일은, 변화가 두려운 나의 몫일 뿐. 자연에 자꾸 내 관점을 투영하지는 말자. 되려, 여여하고 심상함을 자연을 통해 배우자. 

사실, 고목이 된 벚나무는 변화 안에서 단지 '심상히' 서 있을 뿐이다. 늙음도 죽음도 대수롭지 않게.

/중앙중도훈련원

[2018년 8월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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