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의 삶/ 개인 맞춤문화시대

'하비인더박스'에 들어있는 나만의 도자기 만들기 키트. 도자기부터 연필, 붓, 물감까지 들어있어 편리하다.

[원불교신문=민소연 기자] 이번달에도 어김없이 박스가 도착했다. 쉬는 날 집에 있기를 좋아하지만 새로운 것에는 민감한 나, 직접 만드는 데 기쁨을 느끼는 내게 도착한 '취미박스'. 두근두근 열어본 박스에는 '집에서 즐기는 도자기! 세라믹 페인팅' 키트가 들어있다. 사각접시와 찻잔 2개, 붓 2개, 연필과 파란색 물감. 이번 '취미박스'는 1차 소성(굽기)을 마친 초벌도자기에 마음대로 그림을 그려 하나뿐인 접시와 찻잔을 만드는 취미다. 

밑그림을 그리고 파란 물감을 칠한 뒤 다시 박스에 넣어 택배기사를 기다리면 끝. 4주 후 완성작이 돌아오는 나름 대장정의 취미다. 관심은 있었지만 공방에 찾아가기까지 엄두가 안났던 내게, 이미 만들어진 데 살짝 그림만 입히는 이번 취미는 안성맞춤. 이러니 다음 취미박스도 기다릴 수밖에. 

1인가구·개인주의 성향 속 각광
내 개성과 성향에 맞춘 취미를 제안하는 '취미박스'. 이처럼 누구나가 아닌 나를 위한 제안, 즉 '개인큐레이팅'의 시대다. 흔히 큐레이팅이라고 하면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멀끔한 정장 차림의 큐레이터를 생각하기 쉽지만, 이제는 본래 말 뜻으로 쓰곤 한다. 여러 정보를 수집, 선별해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 전파하는 큐레이팅은 이제 부자나 권력자들의 전유물이 아닌, 평범한 내가 누릴 수 있는 서비스가 됐다.

가장 핫한 분야는 역시 취미다. 혼자 사는 가구의 증가와 더불어 내 시간과 에너지를 중요히 여기는 개인주의 속에 자연스레 취미큐레이팅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TV 예능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 취미는  게스트 캐릭터 그 자체로, 캐스팅부터 특이한 취미 보유자를 찾는다. 워너비로 떠오르고 있는 VJ 역시, 대도서관의 게임이나 씬님의 메이크업, 벤쯔의 먹방은 취미로 시작해 직업이 된 경우다. 

똑같은 교육과 기성제품의 소용돌이 속에 천편일률적으로 살고 있는 현대사회 속에서, 취미는 자신의 개성과 취향을 담아낼 수 있는 유일한 창구다. 특히, 직업을 통한 자아실현이 더 이상 불가능한 시대를 사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더 그렇다. 일은 생계를 위한 것으로  생활과는 철저하게 분리하며, 인간적인 기쁨이나 성취감은 오히려 취미에서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향 분석으로 맞춤 취미 처방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취미큐레이팅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성향을 파악해 맞는 취미를 매달 챙겨준다는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지난해부터 크라우드펀딩 등으로 시작한 '하비박스'와 '하비인더박스', '하비풀' 등이 있다. 

하비박스의 경우 몇단계의 설문을 통해 창작형·조립형·감상형·오락형·분석형 5가지 유형으로 선별, 각각에 맞는 취미를 제안한다. '하비큐레이터'라는 9명의 전문가들이 매달 취미를 연구·제안하는데, 이 중에는 서양화가 유상영, 마술사 류경식 같은 프로도 있고, 리폼블로거 몽실이와 같은 아마추어계의 고수도 있다. 

'사람들의 지친 일상 속에 즐거움을 주자'라는 모토로 지난해 문을 연 하비인더박스는 아날로그 감성 회복을 지향하는 특화된 업체로 '손으로 만드는 즐거움'을 추구한다. 1개월이나 3개월, 6개월로 신청할수 있는 취미박스는 매달 박스를 열 때까지 내용물을 알지 못한다. 가격은 한달 기준 2만5천9백원~2만9천9백원으로, 돈과 에너지가 많이 들었던 취미 진입장벽을 확 낮췄다. 
페이퍼커팅 아트북, 내맘대로 토퍼, 천연가죽 필통, 석고타블렛, 나만의 향수, 드림캐처, 스마트폰TV, 티블렌딩, 브릭픽셀아트, 아트토이컬러링, 네온사인 등 다양한 취미박스 속에는 여타의 준비물이 필요없을 정도로 다 담겨있다. 정기배송 뿐 아니라 단품으로도 구입 가능해, 일상이 무료하고 팍팍한 친구나 가족에게 선물하기에도 제격이다.

저렴한 가격에 새로운 취미를 경험해보는 취미박스. 단순히 잘 포장된 패키지를 넘어, 자신의 개성과 취향을 파악하고 맞춤형 대안을 처방한다는 데 각광을 받고 있다. 직접 움직이기에 귀찮거나 여유가 없는 현대인들에게 이만한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또 없다는 평가다.

설렘자판기에서는 청계천 헌책방 주인들이 추천한 8가지 테마의 책이 랜덤으로 나온다.

청계천 헌책방거리 살리는 노력
사실 개인큐레이팅은 취미에 앞서 도서 분야에서 시작됐다. 온라인서점이 도서큐레이팅 서비스를 시작하고, 여행이나 인문학 등 주인의 취향과 관심에 따라 운영하는 작은 서점들이 늘어나며 더욱 알려졌다. 최근에는 한번 더 진화해, 청계천 헌책방을 배경으로 한 '헌책큐레이팅'이 뜨고 있다.

'원하는 주제에 맞춰 헌책방 주인이 책을 추천해 보내자'는 참신한 아이디어로 시작한 '설레어함'은 2016년 연세대학교 동아리 '책 it out'팀의 기획과 실행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청계천 헌책방거리를 되살리자는 상생의 뜻에서 비롯된 '설레어함'은 선택한 주제에 맞춰 추천된 책이 랜덤으로 오는 헌책박스다.

청계천 헌책방 거리는 대학생들이 원서 및 교재를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 곳이었고, 그만큼 많은 지혜와 낭만이 쌓여있다. 60~70년대에는 200여 개에 달했던 헌책방, 그러나 이제는 20여 개 정도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상황이다.     

이 헌책방거리에 활력을 불어넣은 설레어함은 1만5천원에 3권을 보내주는데, 선택할 수 있는 6개 주제부터 깜찍하다. '빛나라 지식의 별', '일상 속 여유 한 모금', '새벽 두시 보다 짙은 감성', '성찰과 사색 사이', '영화를 보는 듯한 긴박감', '안알랴줌' 중 주문하면, 헌책방 주인들이 책을 랜덤으로 보내준다. 언뜻 단순해보이지만, 상자를 열때까지 제목을 모르는 설렘이 압권이다. 무엇보다도 헌책도 인터넷에서 주문하다보니 점점 사라지는 헌책방서점과 그 역사와 문화를 살리고자 하는 노력이 빛을 발해, 대형 인터넷서점이나 쇼핑몰에서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다. 

설레어함이 인기를 끌다보니 자판기도 등장했다. 서재나, 무인판매점 타입의 구입처를 대학로와 신촌에 운영하다 아예 자판기로 업그레이드한 것이다. 지난해 경기도 고양시 한 쇼핑몰에 오픈한 설렘자판기 1호를 찾았다. 7천원을 넣고 선택한 주제는 '너는 한번도 안봤을 책'. 소개팅 하듯 두근두근 설렜다. 청계천 국도서적 사장 얼굴이 나온 감사엽서, 책갈피, 고양이스티커와 함께 이외수의 〈벽오금학도〉가 나왔다. 과연 정말 한번도 안 본 책이었다.

개인큐레이팅은 정보 과잉의 시대, 나만을 위한 추천이라는 특별함을 선사한다. 뭐 하나를 사려해도 '국민 OO'와 같은 똑같은 제품을 쓰는 몰개성의 시대, 나를 알아주고 챙겨주는 소중한 가치. 특히 젊은 세대에게 각광받는 개인큐레이팅은  현대인들이 어떤 데 위안을 얻고 행복을 느끼는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손으로 만드는 아날로그 감성을 지향하는 '하비인더박스'의 취미들. 1개월이나 3개월, 6개월로 신청할수 있는 취미박스는 매달 박스를 열 때까지 내용물을 알지 못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2018년 8월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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