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민소연 기자] 법복의 앉은 모습이 낯설지 않다. 회색빛 빌딩 속에 희게 앉은 우리들의 독경도 차분하게 도심에 울려퍼진다. 내 마음이 편안하니 지나는 눈길들도 따스하다. 충무공과 세종대왕 어깨 너머로 지는 노을 속에서, 99년 전 선진들의 거룩한 밤이 여기 펼쳐지고 있었다. 서울 한복판 광화문, 법인절 기도가 광장에 나온 여름밤이었다. 

최근 4년, 교도라면 아마 한번쯤은 광장에 왔을 것이다. 사무쳐서도 오고 간절해서도 왔으며 위로하러도 왔었다. 그러는 사이, 높고 먼 곳이었던 광장은 점차 낮아지고 친숙해졌다. 지나가는 외국인과 인사를 하는 것도, 시민들의 관심과 질문에 답하는 것도 제법 익숙해졌다. 일원상서원문과 성가가 광장에 넘실거렸다. '원불교는 평화'라는 슬로건이 낯설지 않게 됐다. 

그러던 우리가 드디어 99번째 법인절, 축하를 하러 광장에 나왔다. 사직교당이 제안하고 중구교당이 손을 잡았으며 목동·성동·태릉교당이 힘을 합쳤다. 이 자리에는 축하공연이 있었고 법인날인이 있었으며 특별기도가 있었다. 식순으로는 여느 법인절 기념식이었다. 다만 이날 축하객은 서울이었고 시민이었으며 세상이었다.  

처음 광장에 나온 것은 세월호 참사 때였다. 종교인 천막에서 시작했으나 매주 함께 울고 위로하다보니 광장이 곧 교당이었다. 축적된 광장에서의 시간은 사드 반대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걸음에서 빛을 발했다. 알아달라는 외침 한번 없이도 원불교의 목소리는 있는 그대로 세상에 스며들었다. 

2년 전, 원불교100주년기념대회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개최한 것은 지금 이 땅에 원불교가 가장 필요한 곳이 어딘지 가리키는 지표였다. 그때 우리만의 울타리를 벗어나 큰 데로 나온 뜻을 우리는 어떻게 지켜가고 있는가. 서울이었으나 닫힌 공간이었던 경기장 너머, 이미 열린 공간으로 나와야 하지 않았나. 천의 감동과 창생 제도를 언제까지 성지와 교당 안에서만 할 것인가.
광화문광장처럼, 저마다 지역을 상징하는 광장이 있다. 누구나 모이고 고이며 나누는 광장에서 기쁜 날 슬픈 날 함께 하다보면, 언젠간 광장이 곧 교당이요 교당이 곧 광장이 될 것이다. 그렇게 세상과 만나는 것이 곧 교단에 대한 인식 제고이자 문화교화다. 열린 곳에서의 독경 한 자락은 생각보다 힘이 세다.

지난달 열반한 최인훈의 대표작 '광장'에서 주인공은 밀실을 떠나 광장을 찾으려 떠돈다. 그에게 광장은 하나의 권력이나 사상으로 얼룩지지 않은 평화로운 곳이며, 밀실은 세상에 등돌린 자기 안일한 삶이다. 

광장과 밀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우리의 기쁜 날들은 광장으로 나왔는가, 혹은 여전히 밀실에 갇혀있는가.

[2018년 8월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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