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김도훈 교도] 한여름에 꽃을 피우는 나무들은 대부분 꽃을 상당히 오래 피우는 것 같습니다. 벚나무와 같이 봄에 꽃을 피우는 나무들이 잠시 일제히 꽃을 피웠다가 곧바로 떨어뜨려 버리는 것과는 대조적이지요.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와, 시골 담장을 오르며 주황색 꽃을 피우는 능소화가 그렇고 이번에 다루려는 배롱나무가 또한 그렇습니다. 배롱나무라는 이름은 백일 동안 꽃을 피운다고 해서 백일홍이라 불렸다가 발음이 배롱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정설인 것 같습니다. 꽃을 오래 피운다고 해서 꽃 한 송이를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꽃봉오리들을 줄기차게 내놓으며 먼저 핀 꽃이 지고나면 다음 꽃을 피우는 식으로 오래 갑니다. 그래서 이미 꽃이 열매로 바뀌고 있는 나무에 다시 꽃이 피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배롱나무, 즉, 백일홍 나무는 이름 그대로 홍색의 꽃을 주렁주렁 아름답게 피워냅니다. 그 덕분에 많은 곳에서 정원수로 사랑받고 있지요. 제가 이 나무를 처음 알았을 때는 이 나무가 그 꽃의 아름다움 때문에 공원, 주거단지, 공공기관 등에 심어지는 것을 보아 우리나라에 도입된 지 얼마 안 되는 나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나무는 조선 초기에도 선비들이 사랑했던 참으로 유구한 역사를 지닌 나무였습니다. 다만 우리 선조이신 선비들이 이 나무를 사랑하여 가까이한 이유는 꽃이 아닌 다른 데 있었습니다.

나무는 자라면서 몸을 감싸고 있는 껍질이 비좁아져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몸에 맞게 고쳐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그래서 소나무 등 많은 나무들은 좁아진 껍질을 트게 해서 그 갈라진 껍질을 두툼하게 계속 몸에 붙이고 있기도 하지만, 아예 껍질을 자꾸만 벗어 버리는 나무들도 많습니다. 플라타너스나 중국단풍 등은 벗겨진 껍질이 너덜너덜하게 붙어 있어서 조금 흉하게 보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배롱나무는 껍질을 남모르게 싹 벗어던져 버리고 언제나 단정하고 매끈한 줄기를 드러내고 있는 나무입니다. 그래서 이 나무의 일본 이름은 원숭이도 미끄러진다는 '사루수베리'입니다.

2017년 8월 경희대학교 수원캠퍼스 배롱나무들.

지금까지 저는 일본 사람들이 더 감각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선조 선비들은 이 나무의 줄기 모습에 더 깊은 철학적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이 나무가 자신의 속을 다 드러내놓고 있는 모습을 '겉과 속이 동일한' 것으로 보아 대단히 믿을 만한 나무라고 생각하였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옛 선비들이 살거나 드나들던 곳에는 반드시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었습니다. 전국에 있는 대부분의 서원들에 심어져 있고, 큰 선비들이 살던 고택에도 영락없이 이 나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안동 병산서원의 380년 된 배롱나무는 SNS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나무이고, 논산의 명재고택, 강릉의 오죽헌 등에서도 오래된 배롱나무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신뢰가 가는 배롱나무를 근처에 심어두고 옛 선비들은 친구처럼 대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부터 저는 옛 선비들의 나무 사랑 수준이 현대의 우리들보다 훨씬 더 높다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나무에 부여했던 가치를 우리는 왜 까마득하게 잊고 살아 왔는지 부끄럽기까지 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배롱나무들은 영산 대각터 앞에 심어져 있는 나무들입니다. 이 나무들은 위에서 언급한 서원들이나 고택들의 배롱나무들처럼 역사가 깊지는 않겠지만 대각터라는 탁 트인 환경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마음껏 드러내며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끝물이기는 하겠지만 지금도 그 나무들은 꽃을 피워내고 있을 것입니다. 꽃을 감상하시면서도 그 줄기에 담긴 우리 조상들의 가치관도 함께 배웠으면 합니다. 나아가 여름철이 아닌 시절에 대각터를 방문했을 때도 이 나무의 가치를 새롭게 보아 줬으면 합니다.

[2018년 8월31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