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지은 교무] 소태산 대종사가 마령교당을 방문하자, 오송암(吳松庵)이 대종사를 찾아와서, 두 딸이 입교한 이후로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하는 뜻을 굽히지 못하겠으니, 그 장래를 책임져 달라고 한다. 

이에 대종사는 "나의 법은 과거 불교와 달라서 결혼생활을 법으로 금하지는 아니하나, 그와 같이 특별한 서원아래 순결한 몸과 마음으로 공부하겠다는 사람들에게 어찌 범연할 수야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의 장래는 부모나 스승에게보다 그들의 마음에 더 달려 있나니, 그대나 나는 정성을 다하여 지도만 하여 보자"고 말했다. 이에 오송암이 일어나 절하고 두 딸의 전무출신을 흔연히 승낙했다. 

그리하여 쌍둥이 자매인 오종순·종태는 18세 되던 해에 출가해 총부로 와 입선했다. 그러나 초창기 총부의 사정은 학비를 주면서 공부를 시킬 수가 없어 함께 입선한 7∼8명의 동지들과 함께 전주와 이리에 있는 제사공장, 고무공장 등에서 학비를 벌어야 했다. 그러던 중 병을 얻은 언니 종순은 진안 사가에 돌아가 요양하다가 결국 21세에 열반했다. 〈회보〉 14호에는 그의 열반소식을 접한 대종사가, 오종순을 정식정녀부에 승급시켜 정녀의 원시가 되게 하라는 말씀이 실려 있다. 동생인 형타원 오종태 대봉도는 이후 열반에 이를 때까지, 교화일선과 기관에서 임하며 법통을 생명같이 여기는 선진의 모범을 보였다. 

현재 원불교의 제도로는, 남성은 원불교 출가자인 전무출신을 하면서 결혼생활도 할 수 있도록 길이 열려 있다. 다시 말하면, 남성 전무출신은 결혼을 선택할 수 있다. 이는 소태산 대종사가 말씀한 바와 같이, 가정을 포기해야지만 출가할 수 있다는 과거의 불교와는 다른 방향을 지향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그러나 여성이 결혼생활을 하면서 전무출신을 할 수 있는 제도는 마련되어 있지 않다. 교단적으로 꾸준히 논의가 되어오고 있는 부분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선결돼야 할 많은 과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나, 원불교가 소태산 대종사의 구상대로, 완전무결한 법과 제도를 갖춰 원만한 대회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돼야 할 부분이다. 

소태산 대종사의 여성 9인제자인 박사시화, 장적조, 최도화, 이원화, 이청춘, 이동진화, 정세월, 황정신행, 이공주 등은 모두 기혼자들이 아니었던가. 남편과 사별한 사람도 있고, 두 번 결혼한 사람, 소실도 있었다. 대종사의 부인인 십타원 양하운 대사모까지 포함해, 이들은 초기 교단을 성장시키는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대종사가 오종순의 고결한 뜻을 기려, 그녀를 정녀의 원시로 삼게 한 것에서 원불교 정녀제도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당시에는 정녀로 살겠다는 것이 특별한 경우였음을 이 예화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여자교무는 곧 정녀'라는 공식이 성립되어 있다. 정산종사는 앞으로는 '정남정녀가 귀할 것'이라고 말했다. 

줄어들고 있는 여성 전무출신 지원자의 숫자를 보면 변화는 불가항력적일 듯하다. 결혼한 사람과,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 모두에게 출가의 길이 열렸던 초기 교단의 모습과 정신을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까?  

/미주총부법인

[2018년 9월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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