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정전〉 좌선법에서는 육체에서 정신에 이르는 10가지 공덕을 설한다. 10가지뿐이겠는가. 무한하다. 한마디로 좌선은 일상에 찌든 인간의 한계를 돌파하고 자유자재의 인격을 이루는 일이다. 마침내 사랑과 자비와 은혜의 무한 공덕을 쌓고 베풀어 이 사바세계를 고통에서 건지고 모두가 원하는 불토낙원으로 만들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나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 생긴다. 나는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지금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선택하는 그는 누구인가. 나와 이 세계 및 우주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을 누구든 어느 땐가 했지만, 그것을 지속적으로 가지고 가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그 의문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 없으며, 삶의 고비를 접할 때마다 레코드판처럼 재생된다. 

좌선은 그 답을 찾는 매일매일의 여정이다. 모든 해답은 자신의 내면에 있기 때문이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해답을 품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입구가 곧 출구다. 좌선은 이 입구와 출구가 하나임을 자증(自證)하는 일이다. 따라서 장소·시간에 가림 없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음은 소우주인 자신을 향해 원초적 질문을 던지고 또 던지는 일이다. 

해답으로 가는 길목의 과정은 유식무경(唯識無境)·경식구민(境識俱泯)이다. 전자는 오직 마음만이 있고 경계는 없으며, 후자는 경계만이 아니라 마음 또한 모두 없다는 뜻이다. 실재로 없는가. 따라서 달리 말해 경계에 집착하는 마음을 벗어나게 되면, 그 마음의 근원에는 오직 형형(炯炯, 밝고 밝은)한 영성의 빛이 온 우주를 향해 빛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경지로 나아가야 비로소 존재 자체를 그대로 보게 된다. 

먼지를 걷어낸 거울을 향해 인사를 해보자. 그 안의 나는 바로 나에게 인사를 할 것이다. 그 거울은 좌선으로 갖춰진 나의 맑은 마음이다. 거울은 삼라만상을 다 비춰낼 수 있다. 정신수양에서 말하는 분별과 집착이 사라진 세계다. 분별이 없으니 집착이 없다. 분별이 없음은 모든 존재가 평등함을 일컫는다. 그 평등한 세계에서 솟아오른 존재의 다양성, 그것이 바로 부처다. 각자의 개성을 가진 부처가 나와 같이 현존한다. 어디에도 비견할 수 없는 각자의 우주를 품고 있는 형형색색의 부처들. 그들은 나와 같은 가치의 무게를 지닌 존재다. 내 눈에 비친 모든 존재는 나의 다른 모습, 나의 실존이자 그림자이다. 

삶의 오류는 이렇게 리셋(초기 상태로 돌아가는 것)돼야 한다. 좌선은 삶을 일원상의 진리로 방향을 수정해 전진하는 일이다. 이와 연동된 최근의 명상 기법들 또한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마음챙김에 의한 스트레스 감소 프로그램(MBSR)'의 핵심은 집중과 지혜를 통한 통찰이다. 

자신과 현실을 내면에서 깊이 수용하고 집착을 내려놓게 된다. 결국 생로병사에 순응하는 일, 삼라만상과 둘 아닌 온전함을 즉각적으로 깨닫는다. 길고 짧음에 관계없이 삶은 실존의 의미를 갖는다. 생사의 자유는 마음과 그 집인 몸 모두를 활짝 열고 바깥바람을 자유롭게 맞이하는 일이다. 

그리고 스스로 바람이 되어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영혼이 되는 일이다. 그러니 정토극락이 따로 있겠는가. 

/원광대학교

[2018년 9월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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