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문답-영산선학대학교 박혜훈 교수
'연고'는 시대화·대중화·생활화 지향하는 원불교의 정체성
계문, 대조하고 또 대조하면서 습관의 방향로를 바꿀 수 있어

[원불교신문=박혜훈 교무] 계문을 들여다보면 그 뜻이 모호하게 느껴지거나 왜 이런 조목이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계문의 각 조목이 담고 있는 의미와 정확한 해의를 위해 대중이 궁금해하는 질문을 위주로 요약해 영산선학대학교 박혜훈 교수에게 물었다.

-원불교의 계문은 30계로 이뤄졌다. 그 기준은.
원불교 계문이 현재의 보통급 10계문, 특신급 10계문, 법마상전급 10계문으로 성립되기까지 많은 변화의 과정이 있었다. 초기교단에서는 〈성계명시독〉으로 신성의 진퇴와 실행여부를 대조하거나, 저축조합에서 금주금연과 절약운동, 기도 등으로 살·도·음과 같은 행위를 금기시했던 사항들이 더하여 구체적 계문이 성립되기 이전에 계율로서 지켜졌던 것으로 보인다. 원불교 계문이 30개의 조항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은 원기12년(1927)에 발행된 <불법연구회규약>인데, 이후 조항의 이동이나 약간의 표현이 바뀌는 과정을 통해 현재의 30계문으로 정리됐다.  

-불교에는 많은 계가 있는데, 원불교에서는 왜 30계문으로 이뤄졌나.
초기간행물 〈회보〉 46호에, "재래불교에 있어서는 수백 가지 다수의 계문이 있지만 본회는 불법의 대중화 보통화를 그 목표로 하는 만큼 그 중에 누구나 지킬 수 있는 계문을 약 30조만을 수집하여 계문으로 하였으며"라고 설명했다. 원불교 계문이 기본적으로 불교의 수많은 계문 가운데 일부를 수용해 성립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단순한 수용이 아니라 원불교 정신에 기초해 새롭게 혁신·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계문에 '연고 없이'라는 조항이 7개나 있다. 하지만 이 '연고'가 기준점이 없어 보인다. 때문에 상황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무시되는 경우가 있다. 어떻게 보는가.
모든 계문은 마땅히 지켜야 하지만 부득이하게 예외로 인정하는 경우에 '연고'라는 말을 사용하게 된다. 보통급 5조항과 특신급·법마상전급 각각 1조항이 있는데, 이러한 연고는 무조건 지켜라는 뜻이 아니라 지킬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종교의 계문은 절대시되기 쉬워 생활을 하는데 있어 큰 장애 요소가 되는 경우가 있다. 연고는 불법의 시대화·대중화·생활화를 지향하는 원불교의 정체성을 담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연고 없이'가 붙은 조항을 살펴보면, 정신적·육체적 건강을 수호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는 곧 사람의 생명과 인권에 그 무게를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자의적 해석에 대한 우려도 있지만, 단계적으로 계문을 수행해간다면 이러한 우려도 자연스럽게 불식되지 않을까. 

-계문의 조목을 시대에 맞게 조절할 필요가 있지 않는가? 
계문 성립의 기본적인 정신이 온전하게 잘 유지되고 보호된다는 전제하에 계문도 시대적·사회적 상황에 따라 보완하고 개혁할 수 있다고 본다. 예를들어 법마상전급 2조 '두 아내를 거느리지 말며'는 한국사회상황이 바뀌면서 실제적이지 않은 조문이 된 것은 분명하다. 때문에 어느 시점에 이 조항에 대해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현재 이 계문은 마음으로 범계 여부를 대조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계문을 해석하고 이해할 때 보통급인가, 특신급인가, 법마상전급인가를 구분하여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특신급 4조인 '의복을 빛나게 꾸미지 말며'는 개성과 취향에 따라 아름답게 입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분수 밖의 사치를 하는 것에 대해 경계한다는 뜻으로 대조하면 큰 무리가 없다고 본다.

모든 계문이 다 의미가 있기 때문에 절대 존중되고 결코 변화할 수 없다는 입장이라면 이는 오히려 계문에 속박된 견해일 수 있다. 그렇다고 성급한 변화를 꾀하다가 자칫 본래적인 의의를 놓칠 수 있음 또한 간과해선 안된다.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변화를 모색해가야 할 것이다. 

-'연고 없이 사육(四肉)을 먹지 말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오리나 닭 등의 가축과 돼지, 소, 개 등의 사육이 다른 점은 무엇인가.
이 계문은 다른 조항보다 다양한 양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계문인 듯하다. 수도인이 육식을 한다는 것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또한 육식을 금한다고 할 때, 육식에 대한 범위가 모든 고기는 물론 생선까지도 포함해서 이해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사육 즉 네 발 달린 짐승의 고기에 한정하고 있다는 점도 의문시될 듯하다. 

사생일신의 관점에서는 어떤 종류의 육식도 불가할 것이다. 그러나 종교의 계문은 사회문화적인 배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성립된다. 따라서 육식의 범위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농경문화 중심의 사회에서 사육으로 분리되는 소, 돼지, 개 등은 가축이지만 농사를 짓거나 집을 지키거나 하며 더불어 사람의 생활과 밀접하고 식탁에 오르는 것도 귀한 편이라면, 이에 비해 오리나 닭 등은 음식의 재료로서 길러지는 것이 보편화된 생활 문화였다. 이런 면에서 사육과 이육을 구분했다고도 볼 수 있고, 또 다른 면에서는 사육을 먹으면 잔인성이 길러지기 쉽고 가까운 사육의 경우 인과적인 관계로 얽힐 수 있다는 점에서 사육을 먹지 말라 하신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요즈음 대량 사육되는 가축문제나 일명 '먹방'이라는 방송 프로그램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면, 무분별하게 육식을 탐하면서 자칫 생명의 존엄과 가치를 소홀히 여기는 사회 풍토로 이어질까 염려된다. '연고 없이 사육을 먹지 말며'의 계문은 사은이 제공한 은혜에 깊이 감사하며, 몸과 마음을 수호하는데 절제와 중도의 표준을 잊지 않도록 유념하면서 대조해야 한다. 

-법마상전급 계문 마지막은 '탐·진·치심을 내지 말라'이다. 계문의 속성을 보게 되면 모두 탐·진·치를 벗어남이 없는데, 굳이 상전급 계문에 또 다시 탐심, 진심, 치심의 조항을 넣어 둔 이유가 무엇인가.
소태산 대종사의 대자대비심이 계문을 통해 느껴지는 부분이다. 알다시피 보통급 십계문은 처음 입교해서 받는 것으로 비교적 준행이 쉽고 범계 시 죄과가 무거운 계문으로 돼 있다. 차츰 공부가 순숙되면서 특신급 십계문, 그리고 법마상전급 십계문을 받게 된다. 이후 법강항마위부터는 심계로서 더 속 깊은 공부를 하도록 했다. 이와 같이 원불교 계문은 신·구·의 삼업을 바탕으로 단계적으로 계문을 지킬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모든 죄업이 탐·진·치로부터 비롯된 것은 분명하지만, 가장 먼저 몸과 입으로 짓는 직접적인 행위를 조절하도록 해 지난날의 악습을 버리는 동시에 무거운 죄업을 방지하도록 하며, 법마상전급은 좀 더 깊이 있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올바른 마음작용 즉 의업(意業)을 대조해가는 것이다. 마치 외부적인 경계를 중심으로 마음공부를 해가며 점진적으로 안의 내경을 세밀하게 다스려가는 것과 같다. 탐심, 진심, 치심에 대한 계문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탐·진·치심을 내지 말라'고 한 것은 마음에 일어난 탐·진·치를 밖으로 내지 말라고 한 것인가, 아니면 그 마음조차 일어나지 않게 하라는 것인가. 
산책을 갈 때 보면 늘 가던 길로만 가게 된다. 편하기도 하고 습관이 된 것이다. 마음도 이처럼 습관의 길이 있다. 작은 일에 화를 내다보면 어느새 화를 잘 내는 사람이 돼 있다. 그리고 '나는 이런 것 못하는 사람이야'라는 등 스스로 어리석음의 틀에 지속적으로 가두는 경우가 많다. 탐·진·치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계문조항으로 대조하고 또 대조하면서 습관의 방향로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회보〉 48호를 보게 되면 현재의 '탐심을 내지 말며' 조목은 당시 '탐심을 두지 말며'로 지켜졌는데, 탐심이 동할 때 즉시 제거하는 것은 범계로 간주하지 않지만, 그 탐심을 가지고 시간을 끌거나 그 경계에 자신의 본심을 빼앗기게 될 때 즉시 범계로 간주했었다. 반면에 '진심을 내지 말며', '치심을 내지 말라'는 조항은 이러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나면 바로 범계로 간주했다. 우리가 법마상전급 계문을 대조해 공부할 때 효과적으로 지계관리를 할 수 있는데 참고가 될 것 같다. 나타나는 범계부터 차츰 마음속의 범계까지 면밀하게 대조해가면 언젠가 탐·진·치심을 완전히 항복받을 날이 올 것이다.  

[2018년 9월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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