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처선방-강명구 평화마라토너의 유라시아 대륙 횡단

강명구 평화마라토너가 달리는 길은 결코 안전하지 않다. 2차선 도로에 차량 3대가 나란히 달리기도 하고 어둔 터널과 좁은 길도 혼자 두 발로 뚫고 가야 한다.
강명구 평화마라토너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중국 베이징까지 걸어온 길, 앞으로 단둥을 거쳐 북한으로 넘어오는 일만 남았다.

[원불교신문=강법진 기자] 그가 티셔츠를 걷어 젖히자 가슴에 한반도 지도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살갗에 새겨진 그 지도는 한반도 평화통일을 염원하며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중국 베이징까지 42㎞의 마라톤 풀코스를 매일 혼신의 힘으로 달려온 증표였다. 

지난해 9월1일 17개국 1만6천㎞ 유라시아 대륙 횡단에 당당히 도전장을 내민 강명구 평화마라토너. 그는 꼬박 사계절을 쉬지 않고 달려 지난 7일 중국 베이징에 도착했다. 그가 지금까지 달려온 거리 1만3천㎞, 북·중 접경지인 단둥까지는 앞으로 한 달. 이제 고비는 마지막 도전국이자 처음부터 그의 목적지였던 '북한' 입국 허가만 남았다. 압록강을 무사히 건널 수만 있다면 신의주~평양~개성을 거쳐 판문점 지나 서울 광화문까지 그는 전 세계에 유례없는 통일마라톤의 길을 개척하게 된다. 

가장 고난의 여정이었다는 중국 신장 위구르 지역을 지나온 그는 심신 간 지쳐있었다. 강명구 평화마라토너 원불교 후원회는 3차 응원단을 모집해 5일~7일 중국 하북성 장자구시로 건너가 그를 만났다.

강명구 마라토너의 평화통일 염원을 알리는 유모차.

17개국 1만6천㎞ 대장정, 마지막 북한
네덜란드 헤이그 이준열사기념관에서부터 반복된 그의 하루는 새벽 4시에 기상해 오전 6시면 마라톤이 시작된다. 워밍업을 위해 경보로 걷는 초반 4㎞, 점심식사 후 4㎞ 외에는 무조건 달려야 한다. 오전 28㎞가 닿은 지점 어딘가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길을 떠나면 보통 오후 2시반~3시 사이에 마라톤 풀코스 42㎞를 완주하게 된다.

운 좋게 근처 숙박시설이 있으면 몸을 뉘이지만 유럽을 지나 거친 사막과 산맥이 둘러싼 중앙아시아와 중국 신장 위구르를 건너올 때는 매일 밤이 고행이었다. 하지만 뼈 속까지 파고드는 추위와 한여름 이글거리는 태양에도 그는 달려야 했다. 제아무리 힘들어도 어차피 지나야 할 길, 그의 발끝은 언제나 압록강 건너 저 북녘의 땅 아버지의 고향을 향해 있었다. 

중국을 건너오며 그는 "애당초 내 머릿속에는 제2안은 없었다. 오로지 하나, 북을 통과해 남으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시시때때로 닥쳐오는 고난도 두 눈 부릅뜨고 맞서서 이겨냈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의 신비와 드넓은 초원, 푸른 하늘의 아름다움도 내 아버지의 고향 땅을 밟지 못한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러니 처음부터 나의 길에는 우회란 없었다"고 세상에 알렸다. 

누가 감히 그의 가슴에 품은 횃불을 탐할 것인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독일 베를린장벽을 지나 체코,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세르비아, 불가리아, 터키,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이란,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중국 그리고 마지막 남은 북한까지 17개국 1만6천㎞를 홀로 뛰고 있는 강명구 평화마라토너. 

그가 달려온 길에는 전류처럼 눈에 보이진 않지만 강한 연대의 힘이 흐르고 있었다. 홀로 뛰어왔지만 결코 혼자가 아닌, 맞닿은 손이 많을수록 더 큰 빛으로 평화를 밝힐 그런 희망 말이다. 그가 몰고 온 평화바람은 지난 1년 우연자연하게 뒤바뀐 남북 정세와도 맞닿아 있었다.

그는 왜 달리는가
그가 마라톤을 시작한 것은 2015년 125일간의 미 대륙 횡단에서 비롯했다. 59세 늦은 나이에 발을 디딘 마라톤의 세계는 인생 이모작을 고민하던 그에게 뛰면서 삶의 의미를 찾게 해준 소중한 기회였다. 그는 유모차에 최소한의 생계거리만 챙겨 끌고 달렸다. 한참을 뛰다가 그는 생각했다. 이왕 뛰는 길, '남북평화통일'이란 슬로건을 내걸기로 했다. 그때부터였다. 사람들은 강명구 이름 석 자보다 '통일마라토너'로 그를 부르고 기억했다. 

그는 달릴수록 어릴 적 보았던 아버지의 모습을 이해하게 됐다. 아버지는 난리를 피해 할머니와 다섯 형제들과 함께 남한으로 내려왔다. 잠시 피신하고자 했으나 그 후로 북녘 땅을 밟지 못했다. 아버지는 살아생전 이산가족을 찾을 엄두도 못 냈다. 아버지의 고개는 늘 땅을 향했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시를 썼다.       

그는 달리면서 생각했다. '73년간 묵은 체증을 뚫고 통일이 되면 국경 없는 세상을 노래하리라.' 유라시아 대륙을 두 발로 횡단하면서 길 위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배고픔을 달래주고 추위를 녹여주고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줬다. 존 레논이 노래한 '이매진(imagine)' 세상을 보여준 것이다. 그의 마라톤은 아버지의 꿈이자 국경 없는 세상, 분단을 넘어 한반도 평화통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었다.   

지난 1년 쉼 없이 달려온 평화마라토너의 두 다리.
이지철 교도(왼쪽)가 하루 동행주자가 돼 주었다. 

기적 같이 달려온 1년 그리고 원불교
그의 이름은 강명구, 원불교 법명은 '진성'이다. 도미생활의 끝자락에서 만난 뉴욕교당에서 입교했다. 그의 유라시아 대륙 횡단을 후원하는 단체는 평마사(강명구 유라시아 평화마라톤을 사랑하는 사람들)와 원불교 후원회 등이 있다. 처음 그가 네덜란드로 떠날 때는 비행기 표와 석 달 정도의 여비뿐이었다. 그는 유모차에 의지해 터키 중반까지 뛰어왔다. 유모차에는 옷가지, 비옷, 물, 핸드폰, 운동화, 침낭, 텐트 등 생존에 꼭 필요한 물품만 챙겼다. 그 외에는 많은 것을 버려야 했다.

하지만 유럽을 벗어나면서부터는 기후환경과 지리적 악조건에 봉착하면서 차량과 동행자가 절실했다. 그때 평마사와 원불교 후원회가 그를 도와 차량을 지원하고 카자흐스탄과 둔황에 접어들었을 때는 1·2차 응원단을 파견해 그의 건강과 완주를 기원했다. 이번 3차 응원단은 지친 그에게 기도와 위안이 됐다. 김도심 대구경북교구장을 비롯해 8명의 응원단이 중국으로 건너가 기도와 동반주자로서 힘을 보탰다. 마침 북경교당 교무·교도들이 그를 환영하며 베이징공항에서 차로 2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장자구시까지 찾아와 기도식에 함께했다. 

6일 응원단과 함께 뛴 그는 "최근 몇 달 사이 최고 기록이 나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팔다리가 쑤셔서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데 몸이 너무 가벼웠다. 사람이 주는 기운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다"고 거듭 고마움을 표했다. 

이후 그는 베이징에서 며칠 휴식을 갖기로 했다. 마지막 스퍼트를 위한 잠시의 움츠림일 터. 때마침 베이징에서 노영민 주중대사의 환대와 한인회의 응원을 받고, 존재 자체로 힘이 된다는 어머니·부인과 만나 함께 9일 북경교당에서 법회도 봤다. 4차 원불교 응원단은 그가 단둥에 도착하는 10월 초쯤에 또 한 번 모집할 예정이다. 

함께 여는 평화, 릴레이 평화마중기도
원불교 후원회(우리은행 1005-003-411776 원불교서울교구)는 4월부터 강명구 평화마라토너의 무사완주를 기원하는 릴레이 평화마중기도(법회)를 이어가고 있다. 제주도에서 시작해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를 거쳐 현재 서울·경기도에서 기도를 잇고 있다. 평화마중기도는 그가 북한을 거쳐 서울 광화문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될 예정이다. "기필코 북한을 통과해 판문점으로 가고 싶다. 혼자 꿈꾸면 꿈에 지나지 않지만 여럿이 같이 꿈꾸면 현실이 된다. 내가 북한을 넘어갈 수 있도록 원불교가 힘을 보태달라"던 그의 간절한 염원을 띄워 보낸다.

원불교 응원단은 새벽5시반 출발기도로 함께했다.
새벽 6시부터 마라톤을 시작하는 강명구 마라토너가 출발 전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강명구 마라토너를 응원하러 중국으로 달려간 사무여한단과 북경교당 교무 교도들. 중앙 강명구 마라토너 양 옆에는 어머니와 부인이다. 

[2018년 9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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