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혜성 교무] 훈련원에 도착했다. 직원들은 평소 숙소동 '앞마당'에 차례대로 주차를 한다. 내가 평소 주차하는 자리는 현관에서 거리가 멀다. 비도 오고 차에 짐도 있으니, 일단 임시로 현관과 가장 가까운 곳에 주차한다. 짐을 안쪽에 들여놓고, 다시 차에 탄다. 평소에 주차하던 자리로 이동한다. 차에서 내리려고 보니, 현관까지 거리가 새삼 더 멀다. '뛰어가야겠다.' 차에서 후다닥 내려, 목적지인 현관으로 내달린다.

열심히 뛰었는데 얼굴도 다 젖고, 옷도 젖었다. 빗물이 얼굴을 타고 뚝뚝 떨어진다. 꿉꿉한 날씨에, 몸도 마음도 축축해졌다. 고백하건데, 내 차에 우산이 있었다. 맘 편히 우산을 쓰고 올 것을, 빗줄기를 무시한 나의 만용이었다. 후회막심이다. 잠깐 판단을 잘못한 여파를 온몸으로 느낀다. 어리석다고 스스로 신나게 타박하고 들어오다가 갑자기 번쩍! 한 생각이 든다.

비 맞고 뛰어온 것과는 차원이 다른 어리석음을 발견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먼 곳에 주차한 걸까?' 현관 앞마당엔 주차할 자리가 넉넉하다. 그런데 굳이 '평소 내가 주차했던 곳'에 주차한다. 심지어 비까지 맞으며 뛰어왔다. 현재 앞마당에는 차가 한 대도 없다. 더군다나 휴가철에 휴일이라, 며칠간 앞마당에는 내 차 말곤 주차할 차도 없다. 

누가 어디에 주차를 해야 한다는 규정도 물론 없다. 다만, '내가 늘 주차하던 자리'가 내 마음에 '규정'되어 있었을 뿐이다. 나는 왜 굳이 그 자리를 찾아가는 걸까. 부끄럽지만 가장 먼 곳에 주차를 시작한 것은, 처음엔 배려였다. '선택을 해야 한다면, 가장 안 좋은 것을 고르자'던 유념공부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처음엔 분명히 '배려'였고 '유념공부'였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배려'고 '유념공부'가 되려면 '좋은 것은 양보하려는 상대'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훈련원엔 배려 받을 사람도, 내가 양보할 사람도 없다. 불편한 곳을 내가 차지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렇다면 이 행동은 무엇일까? 그냥 멍청한 행동이다. '습관처럼 한 행동'이자 '착심'이다. 생각해보니 나는 스스로에게 속고 있었다. 

매번 '습관'처럼 이곳에 차를 가져다 두면서, 나는 '유념공부'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 보니, 이건 그냥 이상한 행동이었다. 정말 공부가 되려면, 매번 마음을 멈춰서 판단을 했어야 했다. 매번 깨어있어야 했다. 주차할 사람이 많은 날엔 '유념'해 멀리 주차하고, 주차할 사람이 없는 날엔 차를 가까이 두는 것이 진짜 공부였다. 

정산종사는 "착심 없는 곳에 신령하게 알고 바르게 행함이 유념이니 이는 생각 없는 가운데 대중 있는 마음이요, 착심 있는 곳에 미혹되어 망녕되이 행함이 무념이니 이는 생각 있는 가운데 대중이 없는 마음이니라"고 법문했다. (〈정산종사법어〉 경의편 22장)

착심은 있었고, 대중은 없이 행동했다. 그렇다면 늘 무념이었다. 스스로는 '유념공부'를 하고 있다고 착각까지 해왔다. 매 순간에 깨어있지 않으면 '유념공부'는 아니다. 자칫 유념공부의 탈을 쓴 무념을 하게 된다. 행동은 같아도, 공부는 절대 아니다. 애석하게도 이 당연한 사실을, 비를 흠뻑 맞고야 깨달았다. 순간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 공부인이 되어야 함을 말이다. 잊지 않아야겠다. 

/중앙중도훈련원

[2018년 9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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