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지은 교무] 영타원 임칠보화는 초량교당과 마산교당의 창립요인으로 평생을 신심으로 일관하며, 당시 아직 활발하지 못했던 부산지역의 교화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원기21년 부산에 내려 온 소태산 대종사를 임칠보화가 집으로 초청하고자 했다. 그러나 대종사는 "그대는 신심이 지극하나 그대의 부군은 아직 외인이라 가히 양해를 하겠는가"고 말한다. 
대종사는 영타원 대호법의 신심을 헤아렸으나 남편을 염려해 사양한 것이다. 이 말을 전해들은 남편은 대종사의 인품에 크게 감동했고, 이후 대종사가 부산을 찾으면 부부가 정성으로 시봉했다. 

깨달은 어른이지만, 신심 있는 교도의 집에 초대받아 방문하는 것 하나에도 대종사는 이같이 신중히 처사했다. 이것이야말로 상대방의 처지와 근기에 맞는 '불공하는 법'이라 할 것이다. 자칫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이로 인해 관계가 성글어질 수 있는 일임을 알았기에 그러했을 것이다. 

원만하지 못한 취사 하나 때문에 상대방의 마음을 되돌리기 힘들만큼 상하게 하거나, 일을 그르칠 수가 있다. 특히 다수의 사람들을 상대할 때에는, 무심코 한 말이나 행동, 원만하지 못한 결정 등이 원인이 돼 큰 분란을 일으킬 수도 있으므로 더욱 신중해야 할 것이다. 

원다르마센터 훈련기간 중의 일이다. 일요일 아침좌선을 마치고 훈련객들은 행선을 위해 밖으로 나간 사이에, 나는 법당이 빈틈을 타서 두어 명의  교도들과 함께 일요법회를 위한 방석을 펴고 있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안 나가고 의자에 앉아서 졸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서 "법회를 위해 방석 깔아 놓아야 하니 좀 비켜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가 자기는 선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며, 화를 내며 나가는 것이다. 나중에 듣자 하니, 마음이 이만저만 상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아니, 방석을 깔고 있으면 알아서 나가는 게 당연한 것이지' 하는 생각에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보니, 그의 입장도 이해가 안 되는 바가 아니다. 몸이 불편한 그는 남들이 행선을 나간 사이에 법당에서 조용한 시간을 갖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부산하게 방석을 깔고 있으니 오히려 그의 심기가 좋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선을 안 가고 법당에서 시간을 갖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으면, 필자도 취사가 좀 더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아니면 좌선 마치고 '이제 법당 정리를 하고자 한다'고 공지라도 했을 것이고, 그랬으면 그도 마음의 준비를 하며 다른 곳으로 이동하든지 대처를 취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당연히' 법회준비로 그가 비켜야 한다는 나의 생각으로만 취사한 결과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말았다. 나중에 그로부터 사과의 카드를 받기는 했으나, 나 역시 취사가 원만하지는 못했다는 반성을 했다. 

교화뿐 아니라, 누구라도 사람들 상대하는 일은 참으로 세세한 마음 씀이 필요한 일이다. 아직 입교하지 않은 부군의 입장을 염려해 초대를 사양한 대종사의 신중한 심법과 취사는 임칠보화의 남편을 감화시켰다. 

'배려', 이 두 글자 속에 인간관계, 불공의 키워드가 들어있다. 

/미주총부법인

[2018년 9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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