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인간은 의문의 동물이다. 이 의문을 부여잡고 운명의 주체를 끝까지 파헤친 사람이 선사다. 의문의 끝은 청정한 자성을 회복하는 것에 있다. 혜능은 "선지식들이여, 세상 사람들의 성품이 본래 청정하니 만법이 자성에 있다"(〈육조단경〉)고 한다. 그는 직접 사람의 마음을 가리켰다. 그래서 그의 선을 돈오선이라고 한다. 세계를 통찰하는 능력을 가진 본래성불의 본성을 언하에 바로 회복하는 것이다. 

청정한 자성은 분멸망상 이전의 마음이다. 이는 지혜로써 관조해야 만이 드러난다. 이후에 선사들은 이 본래무일물인 자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제자들을 몽둥이로 때리거나 '할'이라고 고함을 치거나 오랜 동안 침묵을 지키거나 했다. 분별망상의 노예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한 자비방편이었다.       

인간 세상은 분별망상에 의해 움직인다. 대화가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같은 달을 가리키지만 그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대화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가 실재를 가리킬 뿐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만 이해해도 대화를 위해 쏟는 우리 에너지의 반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언어는 그 실재를 이해하기 위한 가상의 도구에 불과하다. 실재를 터득한 인간은 머릿속에서 언어로 기억하며 이를 자신의 견해로 삼는다. '나'에 의해 실재가 구성된 것이다. 실재는 언어에 의해 소외되어 있으며, 그 언어에 의해 나 또한 실재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언어는 실재를 전달하는 도구이자 실재를 담는 그릇일 뿐이다. 분별은 이 언어의 구성과 확산이다. 

석가모니불은 뗏목의 비유를 들면서 "옳은 법도 버려야 하거늘 어찌 법이 아닌 것에 집착하겠는가"(〈증일아함경〉)라고 설파한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언어로 구성된 지식인 견문각지와 그 언어로 끊임없이 사고하는 사량분별을 버려야 한다. 후대에 선사들은 이처럼 말과 문자가 병을 주는 근본이자 병을 치유하는 처방이라는 것을 예리하게 알았다. 혜능의 시대에 자신의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이 본성을 보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잃어버린 것이다. 

송나라 때 문자선, 의리선이라는 말이 나온 것은 이 때문이다. 유학자들은 경전의 말씀에 집착하여 진리라고 믿었으며, 불교계 또한 그 영향으로 문자중심주의에 물들어 갔다. 화두참구는 마음을 집중하여 이 분별을 타파하기 위한 과정이다. 나아가 분석하지 않는 마음으로 자신의 본성을 성찰하고 관함으로써 깨달음에 이른다. 의심→의정→의단이 바로 그것이다. 그 깨달음의 흔적을 모은 것이 〈벽암록〉, 〈무문관〉, 〈송고백칙〉, 〈종용록〉 등이다. 화두선의 개척자인 원오극근은 〈벽암록〉에서 "오천사십팔 권의 일대장교는 마음이나 본성을 돈이나 점으로 설명하는 말일뿐이다. 어디에 이 소식에 있는가"라고 한다. 

간화선을 확립한 대혜종고 또한 "사량분별로 능히 헤아리지 못하는 자는 누구인가"(〈서장〉)라고 하며, 노련한 늙은 쥐가 소뿔에 들어감에 문득 나아갈 곳이 끊어짐을 보는 것까지 가야 한다고 설한다. 확연통철하게 되면 분별로 왜곡된 존재와 세계를 진실하게 보게 된다. 동시에 분별지에 의한 번뇌 망상이 그대로 지혜로 전환되어 번뇌망상은 곧 깨달음으로 분별식은 곧 진공묘지(眞空妙知)가 된다. 의심은 회광반조의 전환축인 동시에 깨달음의 동력인 것이다.

[2018년 9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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