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종법사 당선된 전산 김주원 원정사

교단 제3대 제3회 후기를 이끌 원불교 제15대 종법사에 전산 김주원 원정사가 선출돼, 18일 중앙총부에서 신임 수위단원들과 함께 대중의 환영을 받고 있다. 신임 전산 김주원 종법사의 대사식은 11월4일 거행된다.

원불교 제15대 종법사 당선
"전산 김주원 원정사가 제15대 종법사로 당선됐습니다."
중앙총부 개벽대종의 종소리가 33번 울려 퍼졌다. 18일 오후 2시42분 원불교의 최고지도자이자 6번째 법주가 탄생한 순간, 수위단원은 전원 기립박수로 신임 종법사를 환영했다. 교단 제3대 제3회 후기를 이끌 원불교 제15대 종법사는 영산선학대학교 총장 전산 김주원(70·田山 金主圓) 원정사로 최종 확정됐다. 

교단 '주법'이 되고 '얼'이 되라
당선 결과가 발표되자 전산 종법사 당선자는 오후 4시20분 중앙총부에 당도해 교단 원로교무와 수위단원 이하 대중의 축하와 꽃다발을 받았다. 김인경·성도종 전 수위단회 중앙단원은 정문에서, 대중은 영모전 광장에서 전산 종법사 당선자에게 대례로 예를 올렸다.

전산 종법사 당선자는 제234회 임시수위단회에서 의장 죽비를 전달받고 "나는 살면서 '내가 잘났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내가 부족한 것은 단원들이 챙겨서 하나의 수위단이 되고 교단이 된다고 생각한다"며 "새 수위단원 선출을 보면서 여러분들이 합의한다면 그것이 바로 교단의 방향이 되겠구나 하는 신뢰가 생겼다. 단원들 모시고 정성껏 해보겠다"고 당선 소감을 밝혔다. 

전산 종법사 당선자는 새 수위단원들과 함께 영모전으로 이동해 "전 단원이 한마음 한 뜻으로 거룩한 소태산 대종사의 교법을 봉대하고 역대 스승들의 크신 경륜에 의지해 대중의 뜻을 헤아리고 세상을 일깨우는 데 혈심혈성을 다할 것을 맹세한다"고 역대 선령제위 전에 봉고기도를 올렸다.

이어 성탑참배와 종법실을 거쳐 경산종법사를 배알했다. 경산종법사는 "교단의 경사가 세계의 경사라는 신념을 가지라. 이제 전산 원정사가 '교단의 주법'이 되고 여러 수위단원들이 '교단의 얼'이 될 것이다. 너무 무거운 짐일 수 있으나 새 종법사를 중심으로 수위단원들이 합력해서 교단 일을 세계 일로 알고, 오늘처럼 천지공사해 주기를 간곡히 바란다"고 부촉했다. 너무도 청명했던 가을하늘 아래, 신임 종법사·수위단원은 경산종법사를 모시고 원각성존 소태산 대종사 성탑 앞에서 환하게 웃어보였다.  

일원교법·스승에 대한 믿음, 출가
전산 김주원 원정사는 스승의 경륜을 실현하기 위해 낱 없는 마음으로 초지일관하고, 교단의 법제와 행정체제를 정비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해왔다. 전산 원정사는 1948년 10월10일 전북 전주에서 부친 제산 김제암 교도와 모친 상타원 민묘선행 교도의 3남4녀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자신의 일은 스스로 알아서하는 자립심이 강해 부모로부터 공부하라는 말을 한 번도 듣지 않았으나, 초·중·고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사가가 교당 인근에 있어 평소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던 차, 전주고등학교 2학년 시절에 교동교당 초대 학생회장인 친구의 권유로 원불교에 입교했다. 

입교 후 〈원불교교전〉을 보고 법문이 마음에 와 닿아, 종교를 갖는다면 평생 원불교에 입문해 백옥무하(白玉無瑕)의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산 원정사는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신도안에 가서 대산종사를 뵙고 침수 수발을 하며 자연스럽게 출가를 생각하게 됐다. 평소 성격이나 기질상 부족한 점이 많아 스스로 고쳐보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들었으나, 그러한 마음이 전무출신을 서원한 근간이 돼 원기52년(1967) 3월 신제근 종사의 지극한 원력으로 출가하게 됐다. 

전산 원정사는 원불교학과 수학시절, 방학이면 신도안에서 대산종사를 모시고 살았다. 그때 대산종사의 수필법문 노트를 보면서 교단에 면면히 흐르는 정신을 느꼈으며, 정전대의와 교리실천도해 법문을 통해 교법을 체득했다. 전산 원정사는 교리공부하면서 해득이 안 되면 스승에게 여쭙거나 해득이 될 때까지 연마하고 적공했다. 

전무출신으로 걸어온 길
전산 원정사는 원기56년 서원승인을 받고 기획실·총무부·부속실·교화부 등 교정원 실무자로 근무하다 원기74년 동전주교당, 원기75년 종로교당에서 교화했다. 이후 중앙중도훈련원, 총무부, 부산원광한의원, 법무실, 교정원 교화부원장, 경기인천교구장, 중앙중도훈련원장, 수위단회 중앙단원, 교정원장을 역임하고 현 영산선학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하며 전무출신 인재양성에 매진하고 있다.

교정원 재직 시에는 다산 김근수 교정원장을 10년간 시봉하면서 진리와 심공(心功)에 대한 배움을 가졌고, 40대 초반 종로교당에서 근무하며 불퇴전의 서원과 신심을 확연하게 깨쳤다. 또한 교화부장 법타원 김이현 종사를 보좌해 교화부에서 재직하면서는 교화단법과 교도법위등급에 따른 교도단계별훈련 체계를 잡는 실무담당자로 활동했다. 

6년간의 교정원 총무부장 시절에는 당시 좌산종법사의 유시를 받들어 법규를 정비하고 사장됐던 법규들을 실행하는 데 정성을 들였다. 특히 스승의 경륜을 받들어 해외종법사 제도를 교헌에 담아내는 데 정성을 들였다. 경기인천교구장으로 봉직할 때는 교화후원재단을 설립해 교구 내 개척교당 지원 및 청소년교화와 군종교화, 사회복지 및 일반교화를 후원했다. 원기91년 7월 제152회 임시수위단회에서 정식출가위로 승급해 종사 법훈을 서훈했다. 

교정원장, 영산선학대 총장 역임
전산 원정사는 교단의 행정체계를 세우는 데도 혈성을 다했지만 무엇보다 교리 설법하는 자리를 즐겨 찾았다. 원기97년 중앙총부 교리강습에서 "나는 교단에 들어와서 제1의 화두가 일원상이었다. 원불교를 신앙하는 데 있어 일원상을 모른다면 어떻게 신앙과 수행을 할 수 있겠는가. 앞으로 영생을 두고 화두가 될 것이다"고 할 정도로 교리와 진리에 대한 깊은 연마와 확고한 신념을 지녔다. 

원기94년 11월 교정원장 취임해서는 교구자치화와 현장 맞춤형 인사정책, 교화단과 훈련강화, 영세교화 탈피를 목적으로 행정체계를 잡고, 교단 제3대 제3회 설계위원회를 출범시켜 교단 100년 성업 결실을 원만히 매듭짓고자 노력했다. 

원기97년 11월 영산선학대학교에 취임하면서는 "대종사와 구인선진의 창립정신으로 최선을 다해, 이 법으로 누구든지 부처될 수 있도록 교육하겠다"는 목표로 지난 6년간 인재양성에 매진해 학교를 전무출신 양성소로 크게 도약시켰다. 

경산 장응철 종법사와 전산 김주원 새 종법사의 대사식은 오는 11월4일 중앙총부에서 거행될 예정이다.  

[2018년 9월21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