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의 법향 / 승타원 송영봉 원로교무

[원불교신문=정성헌 기자] "(교단이) 이제는 자리잡았으니까 확 터야해. 그런데 아직도 소심해. 이제 좀 과감해야돼. 그래야 세계 종교와 같이 발을 맞추지. 소심하니까 과감하게 터야 돼. 모든 부분이 다."

아흔이 넘는 고령에도 '교단이 앞으로 어떻게 나가야 하는가'란 질문에 뜻밖의 일갈이었다. 정산종사의 장녀로 태어나 전무출신이 그저 천직인줄 알고 평생 국내외 개척불사의 길을 걸어왔던 승타원 송영봉(93·承陀圓 宋靈鳳) 원로교무. 해외교화의 눈물겨운 초창기 역사를 걸어왔기 때문일까. 그의 일갈은 새로 선출된 지도부에게까지 이어진다.

"종법사님이 이번에 바뀌자나. 새로운 종법사님은 (교단을) 세계화 해야 해. 국내에서부터 세계화 해야 해."

마음공부 대조하냐
승타원 종사는 1927년 12월3일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부친 정산 송규 종사와 모친 중타원 여청운 종사의 2녀 중 장녀로 출생했다. 하지만 법 높은 아버지를 그는 그저 먼 발치에서 뵐 뿐이었다.

"아버지라 부르지도 못했어. 나중에도 정산종법사님이라 불렀지. 공중사에 바쁘셔서 집에도 거의 못오셨지. 영산지부장으로 계실때에도 집안까지 안들어오시고 뜨락에 오시면 나가서 인사드리고 그 뿐이여. 영산지부장으로 계시니까 말하자면 한 몇 집 건너였지. 할머니도 마루에 앉으시면 거기서 인사드리고 가시고 그랬어."

그 때는 모두 그랬다. 당시 전무출신들은 모두 일에 매여 10년동안 집에 가지 못한 적도 흔한일이었다. 그래도 그가 국민학교를 막 졸업했을때 정산종사에게 "마음공부 대조하냐"는 한마디 받들었던 기억은 새록새록하다.

"뭐가 서운한 것인지 어쩐지 아무 가늠이 없어. 다른 사람도 그러고 사는가보다 하고 살았지." 

우리학교 가야지
어려서 총명했던 그는 공부도 제법 잘했다. 그래서 학교 선생은 그를 광주에 있는 상급학교로 진학시키고 싶어했다. "어머니가 학부형회에 가니까 왜 상급학교에 안 보내냐고 막 그러셨대. 나보고는 '네 아버지 월급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상급학교 가야돼' 그랬지. 어린 마음에 그것이 그렇게 가고 싶었어."

구인선진 가운데 가장 여유가 있었던 일산 이재철 선진은 "내가 학비를 줄테니 상급학교 가거라"며 돈을 줬다. 그는 너무 기뻐서 수험잡지 한달 분을 사서 공부를 하는데 나중에 정산종사가 그것을 알게 됐다.

정산종사는 그를 불러서 "니가 상급학교 가고 싶다고 했다면서"하고 물으니 그저 부끄러워서 아무 대답도, 쳐다보지도 못했다. 정산종사는 "지금 갈라고 서두르지 마라. 우리 학교 생기면 우리 학교가지, 상급학교 가지마라"는 말씀에 그만 둘수밖에 없었다.

"내가 총부에서 (간사)근무할 때 언니(전팔근)가 서울로 경기여고를 다녔지. 방학때 교복입고 왔다갔다 하면 우리 방에서 보여. 속에서 불이나. 나도 상급학교 갔으면 저럴건데…. 나중에 크고 나니까 그게 아니더라. 교복입고 중학교, 고등학교 다니는 것이 그리 대단한게 아니더라 그 말이여."

유일학림 생활
그는 원기27년 서무부 서기로 간사생활을 시작했고, 원기29년에는 일제 정신대 강제징집을 피해 서울동대문 부인병원에서 간호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9년 가까이 간사근무를 마친 그는 원기34년 유일학림에 입학해 수학한다. 그러나 교단이 너무 가난해서 10일 가르치고 나면 먹을 것이 없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유일학림을 해산해야 한다고 건의를 할 때마다 정산종사는 "내가 밥을 굶는 한이 있어도 가르쳐야 한다"며 전문 교역자를 양성했다.

"유일학림을 세워 학생을 가르치는데, 1기생을 가르치고, 다음에 우리를 가르치는데 먹을 것이 없었지. 그때는 졸업장도 없었고 수준도 엉망이었어. 우리때까지는 3년 배웠는데 3기부터 4년 했지."

수업은 불교학, 선학, 국문학 등을 배웠다. 숭산 총장이 교전과 철학을 가르쳤고, 불교학은 따로 선생을 불러 배웠다. 당시 동·하선 3개월 전통도 그대로 있었다. 아침 좌선 두시간, 오전 경전 두시간, 오후 고경 두시간, 저녁은 염불이나 회화, 강연을 돌아가면서 두 시간 하루 8시간씩 매진했다.

"박창기 선생이 한문을 가르쳐주셨고, 서대원 선생이 점심 먹고 나서 온 구내 대중을 모아놓고 고경을 강의해. 동·하선 나면서 일하면서도 공부하고 공부하면서도 일하고 살았지."

승타원 송영봉 원로교무는 아흔이 넘은 고령에도 소태산 대종사에 대한 은혜를 잊지 못했다.

교화에 꽃 피우던 시기
유일학림을 마친 그는 원기38년 운봉교당으로 발령된다. 당시 운봉교당은 모두가 꺼려했던 곳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지리산으로 숨어든 무장공비들이 밤이면 민가를 습격하는 일이 자주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지리산과 인접한 운봉교당도 매우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는 더욱 아버지의 의중을 헤아려 담담히 운봉으로 떠났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처럼 배움에 뜻있는 이들을 위해 야학을 개설하고 청소년교화에 매진했다.

"시골 아이들이 다 똑똑해. 겁도 없이 야학을 하는데, 법당이 온돌로 되어 있어서 당번이 돌아가며 불을 지피고 잤어. 통행금지니까 좌선을 하고 아침에 집으로 일찍 가고 선원생활 하듯이 해. 전주여고 다니던 학생이 사회도 봐주고 풍금도 치고 부교무 역할을 다했지." 

또 남원 아영교당을 낸다며 걸어서 출장 다니고, 경상도 함양에 교당을 낸다고 버스타고 다니면서 출장법회를 보기도 했다.

이후 서울교당, 동산교당, 정화사, 원남교당을 두루 거치며 교화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원기60년 대산종사의 해외교화에 대한 적극적인 뜻을 받들어 뉴욕교당 교감으로 부임한다. 당시 49세로 국내 교화에 꽃 피우던 시기에 해외 선택은 주위 인연들이 매우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해외 교화하기에는 적지 않은 나이인데다 당시 그곳은 불모지와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뉴욕교화 13년
말 그대로 고생이었다. "집이 없으니까 삼성에서 사용하는 창고에 들어갔지. 물건놓아진 한쪽에서 자면서 거기서부터 시작했어."

식료품 가게 운영도 만만치 않았다. "상산종사님을 모시고 사는데 그냥 못사니까 장사를 했어, 식품가게를. 그때 백상원 교무가 물건 떼어오고 나는 카운터 지켰지. 그런데 앞으로는 남는데 뒤에서 모자라. 왜그런가 보니 둘려먹어, 말이 안통하니까 둘려먹어도 몰라. 또 한쪽에서는 쥐가 물어가 버리고."

그런 상황속에서 그는 인연 닿는대로 법회에 안내했다. "교도들이 그냥 오지는 않으니까 법회 안내보를 보내야겠는데. 그래서 20장을 손으로 써서 관련 있는 곳으로는 다 보내. 손으로 일일이 다 써서, 사돈의 팔촌으로 연결고리만 있으면 보내는 거야." 뉴욕교화 13년 정성이 쌓이고 쌓여 하나둘 늘어난 교도들이 100여 명에 이르게 됐다.

대종사님 플랜
"대종사께서 일원대도는 만년이 가도 변하지 않는다 했어. 대종사님 정신대로 나가면 온 교단이 흐트러짐 없이 나갈 수 있어. 우리가 신흥종단인데 흐트러짐없이 해외까지 나가니까 다른 종단이 놀래지. 미국에 이제 자리를 완전히 굳혀서 다 잡아서 다들 혀를 내밀어. 보통 종교가 아니다라고." 자부심은 그가 헌신적으로 살아서가 아니다. 오롯한 대종사에 대한 신심 때문이었다.

"대종사님 플랜에 따라 다 이뤄진 회상이야. 우리가 사는 것이 대종사님 정신따라 살아온 것이지 개인이 산 것이 아니야. 어쩌다가 봉사 문고리 잡았어. 대종사님이 그런 말씀을 맨날 그러셨어, 봉사가 더듬다가 문고리를 잡았어, 봉사가 더듬거리다 잡았지. 그런데 알고 잡은 것은 아니지. 우리도 더듬거리다 이 회상을 만났지. 만났을 때 꼭 잡고 놓지 말아야해."

[2018년 9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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