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지은 교무] 대종사는 생전에 제자들에게 신통을 경계했다. 그러나 그것은 제자들이 신통묘술만을 추구하다 정법수행에 소홀할까 하는 염려에서였고, 실제로 대종사가 신통을 보인 정황은 곳곳에 나타난다. 〈대종경〉 전망품에서 앞으로 올 세상을 예언하신 것 중 많은 부분이 근래 들어 벌써 사실로 드러나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김남천, 송적벽에게 그들이 싸우고 다음날 아침 해가 지기 전에 떠날 것이라는 언질을 미리 했고, 실제로 언쟁이 일어나 결국 송적벽은 불법연구회를 떠나고, 김남천은 대종사의 경계함을 생각해 마음을 돌려 남게 된 일화가 있다. (실시품 3장)

어느 날은 한 사람이 와서 소태산 대종사의 제자 되기를 청했다. 대종사는 '다음날 한두 번 다시 와보고 함이 어떠하냐'고 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이미 본인의 마음이 견고하다 하며 허락해 주기를 거듭 청했다. 대종사는 그에게 날 일자, 갈지 자를 써서 일지(日之)라는 법명을 줬다. 법명을 받은 그는 대중에게 '우리가 무슨 인연으로 이렇게 동문 제자가 되었느냐'고 하며, 자기에게 좋은 환약이 있으니 의심하지 말고 사서 쓰라고 했으나 대중이 사지 않자, 화를 내며 '동지의 정의가 어찌 이럴 수 있느냐'고 하며 해가 지기도 전에 가버렸다. 법명대로 되고 만 것이다. 

대종사에게는 상대방의 기틀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약을 팔고자 불법연구회를 찾아온 저의를 짐작하고도 그를 굳이 쫓아내지 않았다. 심지어 숙고 끝에 그에게 일지라는 법명까지 줬다. 그가 마지막 순간에, 이 같은 대종사의 깊은 뜻을 생각해 불법연구회에 남았다면 영생길이 열렸으련만, 정법회상 문고리를 살짝 잡았다가 그냥 놓아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인연 없는 중생은 부처님도 구제하지 못한다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어찌 다음날 일을 예측한 일들 정도로 대종사가 신통력이 있다고 할 것인가. 고해에서 헤매는 중생을 낙원으로 인도하는 정법, 모든 이들이 들어와 제도 받을 수 있는 회상을 펼친 것이야말로 소태산 대종사의 가장 큰 신통력이 아니겠는가?

교당에 다니다 보면, 사람이 모이는 곳은 어디나 그러하듯 인간관계에서 오는 이러저러한 어려움들로 인해 어렵게 잡은 문고리를 놓고 싶은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대종사 새로 입교한 교도에게 '그대가 구하는 것이 나에게 있는 것이라면 영원한 인연이 될 것이지만 만일 나에게 없는 것이라면, 우리의 사귐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인도품 15장) 

일지는 약을 팔 수 있다는 기대로 찾아왔다가 약을 못 팔자 실망해서 떠났다. 교무와 교도들의 인정을 받는 재미로 교당에 다니는 이는 기대에 못 미치는 대우를 받으면 섭섭해서 마음이 식는다. 동지들과 어울리는 재미로만 교당에 다니는 사람은, 마음 맞는 사람이 적어져서 재미가 없어지면 공부심도 시들해진다. 

내가 이 회상에 몸담고 있는 이유, 혹은 교당에 다니는 이유가 대종사가 주고자 한 그것을 얻기 위함인지, 아니면 다른 것 때문인지 자문해 볼만 하다. 만일 소태산 대종사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어떤 법명을 내릴까.

/미주총부법인

[2018년 9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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