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할 수 있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논리철학논고〉)고 했다. 전자는 철학의 영역으로 수학·과학처럼 논리적 정합성을 갖춘 세계를 뜻하며, 후자는 종교의 영역으로 신·진리는 말로써 드러낼 수 없기에 침묵을 지켜야 한다고 본 것이다.

칸트 또한 종교·윤리·예술은 이성의 한계 너머에 있다고 보았다. 결국 종교적 가르침은 실천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므로 아무리 말로써 설명해봐야 무의미하다고 본 것이다. 공안·화두는 이처럼 진실을 체득한 활불로서 인류의 미망(迷妄)을 타파하는 구제행각을 펼치기 위한 철저한 수행과정이다. 

공안은 진리를 깨닫기 위한 조사와 그 제자들의 선문답 사례를 말한다. 일상의 전 존재가 진실임을 드러내도록 이끌어 주는 언어다. 예를 들어 '진리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각전 앞의 소나무'라고 하자. 그 실상을 어떤 관념이나 망상 없이 그대로 바라보는 마음 상태가 됐다면 비로소 청정한 본성을 회복한 것이다. 사량분별로 발생한 주객을 초월, 모든 존재와 하나가 된다. 공안은 무애자재한 청정일념으로 자타·능소·내외가 불이(不二)로써 자신과 전 우주가 일치되는 빅뱅에 해당한다. 

이는 11세기 초 〈경덕전등록〉에 등장한 천 칠백 공안 가운데 조사들이 백칙을 뽑은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분별 이전, 말하기 이전의 세계로 이끄는 채찍이다. 바로 성품을 가리켜 견성성불하게 하는 것이다. 본질은 현성공안이며, 모든 존재가 진실 자체로 현현하고 있는 사실을 보게 된다. 이 과정을 지나면 모든 존재는 법신불의 화현이자 부처임을 알게 된다. 석가모니불이 깨치면 부처요 깨치지 못하면 중생이라고 설한 것은 이를 뜻한다. 불안은 해소되고, 처하는 곳마다 주인공인 무위진인(無位眞人)의 안락을 구가한다. 

화두는 어떤 특정한 공안을 관통하는 핵심 어구가 자신의 절실한 의심의 계기가 될 경우다. 대표적으로는 '무자(無字)' 화두가 있다. 화두참구는 과거 불조의 공안에 대한 의문으로는 도저히 깨달음의 벽을 넘어서지 못할 때, 지금 이 순간 스승이 던지는 화두에 온몸을 맡기는 일이기도 하다. 이것이 간화선의 시작이다. 실제로 의심을 일으키는 주체와 의심이 하나가 되고, 눈덩이처럼 확장되어 천지와 일체가 되는 핵융합 과정이다. 

간화선의 주창자 대혜종고가 스승의 저술인 〈벽암록〉을 불태우며, 이를 도의 장애, 쓰레기, 잡독이라고 혹평한 것은 업장이 무거운 수행자가 과거의 쓸데없는 깨달음에 집착하여 자신의 한계를 돌파하지 못하는 현상을 타파하기 위한 것이다. 고봉원묘가 대신근·대분지·대의정의 간화삼요를 제시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화두는 혼침을 흔들어 깨우고, 분별하는 허구의 마음을 차단하며, 산란심을 일으키는 마음을 무너뜨려 확철대오를 유도하기 위한 자비의 언어를 일컫는다. 

공안이든 화두든 목표는 견성성불이다. 깨달음을 기다리지 않고 오직 여기에 우주적 실체를 확인하기 위한 무쟁삼매(無諍三昧, 마음 속 다툼이 없는 상태)의 경지에 들어서야 한다. 일순 깨달음의 기연(機緣)을 만나 법신, 법성, 진여의 핵심에 도달한다. 그리고 일거수일투족이 부처의 행이자 법설은 진실 그대로이며, 무한 공덕을 베푸는 자비행의 길로 나아간다.

/원광대학교

[2018년 9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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