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 / 서울교구 서울교당 황중환 교도
편지 한 장에 입교해 반백년 오롯한 신앙
교당일 도맡아 하며 공심과 공부심 키워

[원불교신문=민소연 기자] 찬바람 부는 계절에 특히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 따뜻한 차 한 잔, 도반과의 정다운 대화, 그리고 손으로 써내려간 편지. 그런데 이 손편지 한 장에 교당 문턱을 넘어 반백년을 오롯이 신앙해온 이가 있다. 이 로맨틱한 사연의 주인공, 서울교당 공산 황중환(公山 黃中煥) 교도회장이다.

영광 군남에서 나고자란 그는 스무 살까지 원불교와는 인연없이 살았다. 그러던 원기50년, 국민학교 동창모임에서 만난 옛 친구의 모습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그가 기억하던 모습과는 너무나 달라진 친구, 갓 스물이었지만 인격적으로 너무나 성숙하고 원만한 그 모습에 그는 궁금함을 참지 못했다. 

"그때 그 친구가 나에게 작은 경전과 함께 손편지를 줬어요. 지금도 기억납니다. 물은 시루를 흘러내려 없어져도, 그 물로 콩나물은 자란다는 내용이었어요. 그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면서 원불교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참으로 묘한 인연이었다. 그에게는 그 친구와 관련된 웃지 못할 추억 하나가 생생했다. 숫기없이 공부만 잘했던 그는 종종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곤 했는데, 하루는 투닥거리다가 그가 던진 돌멩이에 학교 유리창이 깨져버렸다. 어떻게 물어주나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웬걸, 변상이 끝났다는 것이다. "시골에서 가난하게 살던 나를, 형편이 좀 나았던 그 친구들이 배려한 거 였어요. 그래도 혼나기는 매한가지인데 국민학생들이 어떻게 그런 마음을 냈을까 두고두고 생각했죠."

당시 군소재지에 살았던 그 친구의 이름은 김양임, 훗날 대산종사를 오래 모셨던 김관현 원로교무다. 그의 손편지에는 출가를 서원하는 과정에서 풍겨나오는 법향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 향기는 그에게 그대로 전해졌고, 그는 곧 교당을 찾아가 김 원로교무의 연원으로 입교하게 된다.

"그때 청년회 활동을 참 재미있게 했어요. 그 작은 시골에서 청년법회 하면 30명은 넘게 왔었고, 교당을 새로 지었는데도 늘 자리가 모자랐었죠. 교당 공사 후에도 손갈 데가 남아있어서 수시로 교당에서 교무님을 도와드렸어요. 교무님 순교 가실 때 옆에서 경종과 목탁 들고 따라가는 것도 제 일이었고요."

그때 인연이 된 심익순 교무는 그가 평생 스승으로 모신 분으로, 서울로 올라온 초기 교당과 잠시 멀어져있을 때 마저도 1년이면 두세 번은 찾아 살아있는 법문을 듣고 오곤 했다. 

"후암동에 치킨집을 열고 자리를 잡아갈 무렵, 심익순 교무님이 서울교당으로 부임하셨어요. 그 길로 교당에 와보니 또 할 일이 많은 거예요. 비만 오면 지하 생활관에서 빗물을 퍼내야 하고, 가을이면 낙엽을 쓸어야 했죠. 마당 뒤벽도 무너지지 않게 매번 공사를 해야했어요."

가까이 사는데다 비교적 시간이 자유롭다보니 그는 하루가 멀다하고 교당에 드나들었다. 불러서도 오고 혼자서도 왔으며, 빗방울만 떨어져도 달려오고 찬바람만 불어도 들렀다. "그렇게 일을 하면서 교무님과도, 원불교와도 마음이 연해졌을 것"이라는 황중환 교도.

"그러는 동안 치킨집이 참 잘됐어요. 당시 인근 대우나 동아제약, 월남참전회 회장 부인들 모임이 있었는데 그 작은 치킨집에서 만나거나 기사를 시켜 사갈 정도였죠. 배달도 안하고, 술도 안 팔았는데 말이에요. 그러면서 백화점에 입점하자, 체인점을 내자 등의 제안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유혹을 마다하며 23년을 오롯이 장사했다. 그 후로는 건물 재개발로 문을 닫은 후, 서울역 옆 한정식집 '해오락'을 열어 10여 년을 운영 중이다.  

"먹는 장사라는 게, 다른 사람들이 먹고 '맛있다', '잘 먹었다'고 해야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다한 거잖아요. 더 많은 이익보다는 내가 할 수 있고 책임질 수 있는 것을 꾸준히 해내는 것, 그것이 곧 자리이타라고 생각해요. 나라는 낱개가 사은이라는 전체와 연결돼 있는 일원상진리처럼, 나와 사회도 마찬가지죠."

음식 한 접시마다 이를 통해 사회공헌을 한다고 생각한다는 그. 이렇게 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낙원세상 가까워질테니 잠시도 소홀할 수가 없다. 그런 그에게 성공이란, 개인의 부귀영화가 아닌 바로 모두의 성공, 즉 낙원세계의 도래다.

"올해 교도회장도 제 부족함으로 고민이 많았지만, 누군가는 질 책임이니 모자란대로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에 맡게 됐어요. 그동안 우리 교당이 참 많은 일들을 이뤄냈는데, 이제 교단적인 대전환기를 잘 맞으며 새로운 도약을 준비해야죠."

그가 생각하는 서울교당의 현재의 몫은 바로 신심과 공심의 무장이다. 최근 교도들이 직접 기획하고 진행한 자율법회 역시 그 첫 걸음이었다. 반백년 넘게 신앙인으로서의 서원은 성불제중이요, 이를 위해 단 한 순간도 공부심을 놓지 않으려 한다는 황중환 교도. 그 다짐이 이제는 좀 되는 것 같아 하루하루 비견할 수 없는 기쁨이 그득하다. 

특별한 비법보다는 교전 한글자 한글자 나와 있는대로, 스승님이 말해준 대로 올곧게 가는 참 신앙인, 늘 깨어있는 그의 법향은 넓고 깊었다. 

[2018년 10월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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