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수행은 무엇인가. 만법의 근본인 한 마음을 밝혀 대각과 해탈, 그리고 중도에 기반한 부처의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또한 그 혜명의 등불로 세상을 밝혀 모든 이웃도 그 세계에 들어와 함께 행복을 누리기 위한 것이다. 공안과 화두, 의두와 성리 또한 그 길로 가는 첩경(捷徑, 지름길)이다. 그런데 불법을 계승한 원불교는 불가(佛家)에서 잘 쓰지 않는 용어인 의두와 성리를 새롭게 내놓았다. 사실 근본은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불법의 현대화를 지향한 소태산 대종사의 깊은 뜻이 담겨있다.  

의두·성리는 소태산 대종사가 걸은 깨달음의 여정과 관련이 있다. '구름은 왜 일어나며, 바람은 왜 부는 걸까', '사람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걸까.' 이러한 물음을 던져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길을 걷다가 '이 모든 것은 무엇인가'라고 문득 질문해 보는 것처럼 모든 의문의 마지막은 '왜' 혹은 '무엇인가'로 귀결될 것이다. 이를 분석지(分析知)로 밀고 나가면 철학의 길로 들어서게 되고, 통찰지(通察知)로 밀고 나가면 종교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그렇다고 반드시 이처럼 나누어진 것은 아니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 양자의 세계를 두루 경험했다. 그것을 후에 의두와 성리로 드러냈다. 분석과 직관을 주관하는 지성과 영성 이 양쪽 세계의 근원은 하나다. 

먼저 의두는 사리에 대한 명확한 분석이 핵심이다. 내용은 대소유무의 이치와 시비이해, 불조의 공안과 화두 모두 여기에 속한다. 대소는 소이연(所以然, 그러한 까닭)이며, 유무는 소당연(所當然, 그렇게 되어야 할 일)의 세계다.

대소는 본질과 현상의 이원적인 세계, 유무는 인과보응의 세계를 말한다. 진리인식의 구조인 체용의 세계관 위에 인과의 이치로 돌아가는 시비이해에 대한 분석을 더함으로써 선악·죄복과 관련한 도덕과 윤리를 실천하는 현실적인 종교가 되도록 한 것이다. 성현들은 이러한 이치를 발견하고 활용함으로써 복과 혜가 충만한 세계를 건설해간다. 훈련 과정에서 대소유무에 대한 감각과 시비이해의 감상을 기재하도록 하는 것은 이러한 마음의 원리를 깨달아 운명을 개척하는 힘을 얻기 위한 것이다. 

성리는 관조와 통찰로써 우주 만유의 본래 이치와 우리의 자성 원리가 둘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다. 성리가 등장한 것은 핵심교리가 처음으로 정립된 초기교서 〈보경육대요령〉(1932년)에서다. 화두 가운데 성리라는 훈련과목이 새로 독립된 것이다. 그것은 직관의 방법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대소유무의 이치에 대해서도 분석만이 아니라 직관을 통해 확립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관념의 뿌리인 언어를 넘어서야 한다. 소태산 대종사가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라는 한 생각의 대입정 상태에 들어간 것은 개념화된 인식적 한계를 돌파하는 의식의 빅뱅(대폭발)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언어가 끊어진 세계로 진입하는 길목이다. 정산종사가 자기의 마음이 곧 부처이며, 자기의 성품이 곧 법이라고 설한 것은 언하에 깨쳐야 될 돈오선과 같은 성리설법이다. 

이 의두와 성리의 목적은 궁극적으로는 진공·묘유·인과로 이루어진 일원상의 진리를 믿고 깨달아 실천하는 것이다. 즉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진리의 주인공이 되는 길이다. 모든 불보살의 깨달음과 자비행 또한 이 과정을 벗어나지 않는다.

/원광대학교

[2018년 10월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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