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혜성 교무] 내겐 작은 신념이 하나 있었다. '있었다'라고 과거형으로 표현해야만 할 슬픈 사연이다. 바로 '직접 살생을 하지 않겠다'는 신념이었다. 

14년 동안 지켜온 신념은, 훈련원에 부임해 '지네' 때문에 무너졌다. 도저히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 지네는 너무 길고, 또 너무 컸다. 그리고 어디에나 출몰했다. 소름끼치게 무서웠다. 살생에 대한 신념이 무너진 것도 괴로운데, 지네를 볼 때마다 소리를 지르며 지네를 싫어하는 내 모습도 또 괴로웠다. 왜냐하면 법문 때문이었다. 

정산종사는 "한 물건도 미워하지 아니하여야 한 물건도 나에게 원한이 없나니라"고 말씀했다.(<정산종사법어> 법훈편 60장) 아직 어린 탓에 살면서 '미움'을 지극히 가질 일이 많지 않았다. 지네를 만나기 전까지는, '미움'이란 감정을 꽤 비워냈다 자만했었다. 그런데 지네는 이 지점을 공략한다. 미워하고 싶지 않은데, 그 마음이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미워하는 나'를 또 내가 미워하는 악순환이 생긴다. 죽이고 싶지 않은데 죽이고, 미워하고 싶지 않은데 미워하며 쳇바퀴 돌 듯 고뇌가 깊어진다. 경계도 이런 독한 경계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비로소 전환점을 맞이하는 순간이 왔다.

지네와의 사투 4년 만에 일이다. 선을 마치고 선실을 나오는 데, 청명한 기운이 가득하다. 온 세상이 침묵한다. 평상심이 이런 것인가, 하던 찰라 복도에서 또 지네를 발견한다. "꺄악~" 영락없이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들이킨다. "이놈의 살얼음 같은 수양력!" 한심하다. '좌선이 잘 되기는커녕, 평상심은 얼어 죽을….' 지네 한 마리에 이토록 마음의 평화를 빼앗기다니. 지네를 잡아 플라스틱 병에 가둬놓고 생각한다.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지네가 싫을까? 지네가 징그러워서?" 때 마침, 돈벌레가 내 앞을 휙 가로지른다. "돈벌레다!" 발견하고, 마음이 그친다. "어? 난 돈벌레엔 무심하다." 잡아 죽일 생각도, 징그럽다는 생각도, 싫다는 생각도 없다. 다시 돈벌레를 자세히 본다. 지네처럼 징그럽게 생겼다. 

"그런데 왜 내 마음에 지네와 돈벌레가 '평등'하지 못할까?" 물리면 아플까봐? 그건 아니다. 지네 때문에 잠 못 이루던 그날, 생각했었다. 나타날 거면 차라리 빨리 물고 사라지라고. 통증이 무서운 건 애초에 아니었다. 단지 싫었다. 그런데 왜 단지 싫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어 현실화를 시키다보니, 놀랍게도 그 공포엔 실체가 없다. "아! 지네는, 실은 돈벌레보다 조금 더 길고 큰 벌레일 뿐이다!" 생각이 비로소 전환된다.

며칠 뒤 또 여지없이 지네를 만난다. 이번엔 지네를 똑바로 쳐다본다. 그간 바들바들 떨면서 바라봤지, '무심'한 눈으로 '자세히' 본 적이 없다. "아 움직이는 것이 징그럽긴 하다." 인정한다. 그러고 나니, 여기저기 휘감으며 도망가는 모습에 "아, 쟤도 살고 싶구나. 쟤도 그냥 놀랐을 뿐이구나." 안쓰러움이 든다. 

똑바로 보니, 진짜로 돈벌레보다 크고 긴 벌레일 뿐이다. 미움을 없애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미움의 자리에 안쓰러움이 싹 트니, 밉지도 무섭지도 않다. '한 물건도 미워하지 말라'는 법문이 비로소 마음에 담긴다. 나는 그날 몇 년간 촘촘히 박아뒀던 침대의 모기장을 제거했다. 나는 이제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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