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차원에서 발전은 '좋은 삶', 누군가의 희생과 착취를 전제로 하는 좋은 삶이란 없어
권력이 커질수록 국제적 정의·책임 성찰해야, 지지부진한 기후변화 문제 근본적 전환 필요

헌법재판소 앞에 선 녹색당 당원들이 생태주의 실현을 위한 정치개혁 구호를 외치고 있다. 출처 녹색당

[원불교신문=허승규 교도] 올 여름 무더위는 여름이면 찾아오는 더위 수준을 넘어, 환경 재난인 폭염이었다. 에어컨 없이 견디기 힘들다는 사람들의 아우성이 들린다. 더워도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난한 나라일수록 폭염에 취약하다. 폭염의 원인으로 기후변화가 거론된다. 에어컨을 틀수록 지구는 더워진다. 어느덧 더위는 사회적, 구조적, 지구적 문제가 되어버렸다.

우리나라의 발전이 다른 국가의 희생과 착취를 고려하는가?
환경 재난인 폭염과 기후변화는, 근현대 사회의 패러다임인 '발전(development)'을 성찰하지 않고선 풀 수가 없다. 발전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어떤 모습은 아니어야 하는가? 발전을 개인적·지역적·사회적·초국적·생태적 차원으로 살펴볼 수 있다. 개인적 차원에서 발전은 '좋은 삶'일 것이다. 누군가의 희생과 착취를 전제로 하는 '좋은 삶'이란 없다. 

개인은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사회적 개인'이기에, 다른 이의 불행과 파괴를 전제로 지속가능한 삶을 담보할 수 없다. 여기서 다른 이의 범위를 어디까지 할 것인가가 쟁점이다. 지역적·사회적 차원에서 발전은 특정한 지역과 계층의 희생과 착취를 고려하여, 비용 분담의 공정성, 자유와 평등의 원리와 같은 민주주의적 요소를 담아야 한다. 산업사회의 절정에서 등장한 '생태주의·녹색주의'는 지구적·생태적으로 타자의 범위를 넓힌다. 

제3세계의 시민, 자연환경과 동식물까지 넘나든다. 사회적 개인은 지구적·생태적 개인으로 나아간다. 사회적 개인의 '좋은 삶'은 타자의 지속가능한 삶이 전제돼야 가능하다. 타자의 범위를 지구적·생태적 차원으로 고려하지 않으면, '좋은 삶'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현실이자 '거대한 역설'이다. 

사회적 약자에게 더 위협적인 환경위기
발전·개발의 역사를 보면 소위 독재정권이라 불리는 권위주의적 정권도 국가 내부적으로는 사회 통합을 위해 발전·개발 과정에서 소외된 이들을 포섭하려고 했다. 부분적으로 민주주의적 요소(정치적 권리뿐만 아니라 사회적 권리 즉 복지의 보장)를 적용해왔다. 강권적인 통치만으론 정권을 지속가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국가를 넘어선 '초국적' 차원과 인간 사회를 넘어선 '생태적' 차원이다. 개별 국가가 성장과 발전을 향할 때, 다른 국가의 희생과 착취를 고려하는가? 우리의 삶을 지속가능케 하는 자연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는가? 전쟁의 폐허를 딛고, 한강의 기적과 민주화를 이룬 한국은 어떠한가? 한국전쟁 당시 국제사회로부터 원조를 받은 역사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면서, 기후변화 문제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진 않은가?

한국의 발전 지향이 초국적·생태적 차원에서 바람직한지 의문이다. 일제 식민 역사의 아픔을 기억하는 것은 보편적이어야 한다. 일본이 한국을 착취한 민족문제의 차원을 넘어, 동아시아 평화의 침해와 회복으로 나아가야 한다. 민족적 특수성을 고려하되, 거기에 머물러선 안 된다. 한국은 더 이상 국제 사회에서 원조를 받는 국가가 아니다.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이 커질수록 국제적인 정의와 책임을 성찰해야 한다. 자국의 부국강병을 위해 다른 민족 국가를 침탈한 제국주의적 역사를, 피해가 아닌 가해의 입장에서 반복할 수 없는 일이다. 

한편 한국의 근현대 발전에서 환경은 너무나도 후순위였다. 어느 정도 경제성장을 이룬 뒤에도, '성장을 어떻게 분배하는지'의 문제에 밀려왔다. 그러나 환경위기는 모두를 위협하면서도, 사회적 약자에게 더 위협적이다. 어린이, 여성, 노인, 가난한 이들에게 훨씬 치명적이다. 더 이상 환경은 먹고 살 만해야 다루는 문제가 아니라, 먹고 숨 쉬며 사는 그 자체의 문제가 돼버렸다. 이제는 환경문제의 중요성보다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가 쟁점이다. 

문제해결의 시작은 관점을 바꾸는 것
새 종법사 선출 소식이 들려왔고, 〈원불교교전〉을 다시 펼쳤다. 소태산 대종사는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인 사은(四恩)의 내역을 밝혔다. 천지, 부모, 동포, 법률 네 가지 은혜가 있어 내가 살아갈 수 있다. 작게 보면 나는 사은의 은혜를 입었기에 보은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크게 보면 나 자신이 곧 사은이다. 은혜를 주고받는 관계,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는 비단 내 주변에 가까운 친구, 가족뿐만 아닌 지역과 국가, 자연의 영역까지 이른다. 

소태산 대종사가 원불교를 개교한 1916년은 서구 열강들의 전 지구적인 발전·개발 프로젝트가 확산되는 시기였다. 성찰 없는 발전·개발프로젝트는 화려한 영광 이면에 전 지구적인 두 번의 전쟁을 초래했다. 100년이 흐른 지금, 기후변화와 같은 지구적 환경 재난, 제3세계의 빈곤문제, 여성과 소수자 인권문제, 지구 곳곳의 정치·경제·종교·인종 갈등이 있다. 문제해결의 시작은 관점을 바꾸는 것이다. 우리가 더 나은 삶이라고 생각하는 발전의 모습이, 자신이 속한 국가의 GDP규모, 1인당 국민소득 지수로만 그려선 안 된다. 발전의 실상은 무엇이며, 그러한 발전에 들어가는 사회적·국제적·환경적 비용은 얼마나 되는지, 그러한 비용은 누가 부담하는지와 같은 총체적인 바라봄이 필요하다. 

특히 기후변화와 같은 환경위기는 기존 사고와 삶의 양식으론 풀 수가 없다. 기후변화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1992년 리우 환경 협약 이후 26년이 흘렀지만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새로운 변화를 위해 근본적인 해법을 모색하기보다 기존 발전 방식을 크게 거스르지 않는 부분적인 해법들을 논의하다가 허송세월을 보냈다. 환경문제도 기존 발전·성장 담론이 아닌 새로운 관점에서 풀어야 한다. 

기후변화는 전 지구적인 정치와 경제, 사회, 생태문제다. 출처 블로그 '생각정원'

발전·성장의 대안적 관점 '생태주의'
발전·성장에 대한 대안적 관점으로 '생태주의'가 있다. '생태주의'는 '환경보호'를 말하기에, '환경주의'와 비슷해 보인다. 구분하자면 '생태주의'는 환경문제 해결을 위해 정치적·사회적 생활양식을 포함한 근본적인 변화를 주장한다. '환경주의'는 환경문제에 있어서 '관리적'인 입장으로, 현재의 생산, 소비에 대한 가치, 양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지금과 같은 삶의 양식, 사고방식을 그대로 두고 기술 발전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환경문제 뿐만 아니라 지금 인류 사회의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수십 년째 지지부진하고 있는 기후변화 문제를 보라.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새로운 담론과 실천이 요구된다. 

정치의 영역에선 1970년대 생태주의 이념을 내세운 녹색당이 출범했다. 한국을 포함해서 전 세계적으로 100여 개 가까운 나라에 녹색당이 있다. 녹색당뿐만 아닌 다른 정치세력들도 환경 이슈를 외면하기 어렵다. 보수적인 정권도 '녹색성장'을 구호로 걸면서 시류에 반응했다. 

원불교는 어떠한가? 우리에겐 이미 준비된 교법이 있다.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임을 밝히는 일원상의 진리,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인 사은, 평등세계를 실현하는 사요, 이러한 교법을 공부할 수 있게 하는 삼학 팔조까지. 21세기 생태주의의 도래와 함께 원불교 교법이 더 나은 지구공동체의 소중한 이정표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안동교당·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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