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혜성 교무] 기차표를 예매하기 위해 홈페이지에 접속한다. "어라? 표가 없다!" 날짜가 꽤 많이 남았는데 매진이다. "큰일이네. 어떻게 하지?"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당황한다. 그러자 옆에 있던 도반이 조언해준다. "버스 타고 가는 건 어때요?" 난 숨도 안 쉬고, 대답했다. "버스는 싫어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기차는 1시간 10분이면 되는데, 버스는 두 배 더 걸린다. 기다리다보면 취소하는 표가 생길 수도 있다. "홈페이지에서 수시로 확인 해봐야지"하고 생각한 뒤 인터넷을 종료한다. 그리고 문득, 번개처럼 한 생각이 스친다. 

그런데 '너는 왜 시간이 많이 걸리는 건 싫으니?' 당연히 여겼던 것에 스스로 딴지를 놓는다. 마음이 멈춘다. 서울에 급한 공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빨리 올라가야 할 특별한 사유도 없다. 단지 휴일이라, 오래간만에 사가에 다녀오려 했던 것이다. 여행처럼 천천히 다녀와도 무방한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왜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은 싫다고 할까. 시간을 절약해야 할 필요가 없음에도 말이다. 게다가 기차표는 비싸다. 생각해보니, 나의 선택에 비용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버스는 기차에 비해 매우 저렴하다. 서울까지 '12,400원'이면 된다. 바삐 갈 필요도 없으면서, 왜 굳이 제일 빠르고 가장 비싼 차편만 '당연하게' 이용하는 걸까. 그러고 보니, 아까 '표가 없다'고 했던 것도 단지 'KTX 표가 없다'는 뜻이었다. 무궁화호나 새마을호는 염두하지 않았다. 내 마음에 기차는 KTX 뿐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조금 충격적이다. 

너무 당연하게, 비싸고 빠른 교통편만 이용한다. 공무가 바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검소하고 담박한 삶을 추구한다던 수도인 아닌가. 말은 그렇게 하며, 실상 비싸도 상관이 없다. 빠르고 편한 것만 추구하는데 저항이 없다.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아 뜨끔하다. 

<대종경>에 나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한 선사가 과실나무 몇 주를 별도로 가꾼 수입으로 상좌 한명을 따로 먹여 살린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남에게 유익 줄 만한 인물이 되지 못하거늘, 그에게 중인의 복을 비는 전곡을 먹이는 것은 그 빚을 훨씬 더하게 하는 일이라, 그의 빚을 적게 해 주기 위해 여가에 따로 벌어 먹인다"고 말했다. 빚이 이렇게 무섭다. 이에 대종사는 "만일 제 일 밖에 못 하는 사람으로서 중인의 보시를 받아먹는다면 그는 큰 빚을 지는 사람이라, 반드시 여러 세상의 노고를 각오하여야 하리라"고 법문했다.(〈대종경〉 인과품 28장) 

내가 '제 일 밖에 못하는 사람인가 아닌가'도 생각해보면 무서운데, '중인의 보시를 받아먹으며 펑펑 쓰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 무섭다. 해결책은 사실 간단하다. 상황에 따라, 능히 KTX로 시간을 절약하기도 하고 또 능히 버스로 돈을 절약할 수 있으면 된다. 상황에 따라 판단을 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판단하거나 선택하지 않는 데 있다. 너무 '당연하게' 제일 비싸고 가장 편리한 것만 추구했음을 이제 자각한다. 비싼 것에 저항이 없음을 반성한다. 생각 없이 행동함을 부끄러워한다. '당연히 하던 일을,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이는 하나의 자각.' 이런 멈춤이 나를 성장시켜 주면 좋겠다. 

/중앙중도훈련원

[2018년 10월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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