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의두요목 5조 "만법이 하나에 돌아갔다 하니 하나 그것은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의 원문이다. 〈벽암록〉에서 조주선사, 〈선요〉에서 고봉선사에 의해 유명해진 공안이다. 〈대종경〉 성리품에서는 소태산 대종사가 제자들에게 과제로 내고 있다. 전통 선방에서는 화두 중 으뜸으로 치고 있다. 필자도 평생 이 의두를 들고 있다. 좌선 때, 차를 타고 가거나 한가할 때, 때로 꿈속에서도 불현듯 이 의두를 풀어보곤 한다. 

핵심 전략은 이 언어로 표현된 사구(死句, 죽어있는 말)가 활구(活句, 살아있는 말, 즉 생생한 현실)로 전환되는 것에 있다. 의두 하나하나는 어디까지나 달(진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관념과 분별에 사로잡히면 우리 마음은 허수아비가 된다. 주인공인 본성은 어디 가고, 객인 각종 지식과 망상의 노예가 된다. 따라서 현란한 문명의 포로가 된 현대인들에게는 이 의두가 특효약이다. 대지를 밟지 못하고, 온갖 숫자와 개념으로 뒤덮인 정보의 홍수 속에서 유랑하는 자신을 비로소 실상(實相, 실재 세계)으로 귀가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만법은 애초에 어디로 돌아가는가. 한 마음이다. 모든 법을 생하는 것은 이 마음 하나다. 그러나 한 순간도 쉼 없이 쓰고 있는 이 마음은 볼 수가 없다. 눈을 보고자하나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마음이 객관화 되는 순간, 고속도로에서 운전대를 놓는 것과 같다. 이 세계는 나와 하나인 것이다. 그러니 하나가 돌아갈 곳이 따로 있겠는가. 알고 나면 이처럼 쉬운데 굳이 의두를 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수학문제가 아니라 절실하고도 궁극적인 삶이라는 문제를 푸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해를 넘어 체험으로 얻어야 한다. 

좀 더 쉽게 알아차리기 위해 체용의 관계로 보는 두 번째 방식을 도입할 수 있다.

만법이 돌아갈 하나는 진공의 세계다. 마음의 모든 차별이 소멸된 곳, 말하자면 평등무차별한 세계가 우리 본성이 뿌리박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그곳이 다는 아니다. 차별이 현존하는 곳, 모든 불성이 그대로 드러나 두두물물(頭頭物物, 모든 존재)이 부처로 실존하는 세계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불토낙지가 밝은 태양 아래에 빛나고 있다. 이곳이 그 하나가 돌아갈 묘유의 세계다. 그러나 이것을 둘로 보는 순간 오류에 떨어진다. 삶은 하나인데 어떻게 세계가 둘일 수 있는가. 성속, 자타, 주객, 성상(性相, 본질과 현상), 내외, 유무 등 모든 이원적인 관념이야말로 세계분열의 주범이다. 이를 뛰어넘어 중도를 세워야 한다.      

마지막 세 번째 풀이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 세계를 깨달음의 경지에서 하나라고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일원상의 진리다. 이 외에 무엇으로 표현해도 좋다. 절대적인 은혜의 세계, 우주적 부처의 품안, 일자(一者)인 하느님의 피조물 등. 또한 우리 성품 속에는 불성이, 무극 혹은 태극이, 하느님의 인격이 이미 자리하고 있다. 진리와 내가 둘 아님을 믿는 일이다. 그리고 법신불의 화현이자 은혜구현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길이 이 의두의 요체다. 특신급에서 여래위로 직입하는 것이다.

〈화엄경〉에서는 "믿음은 도의 근원이고 공덕의 어머니"라 하고, 그 믿음은 "일체 선법을 자라게 하며, 모든 의혹을 끊어 없애고, 무상도를 밝게 드러낸다"라고 설한다. 

믿음이 곧 깨달음이다. 자, 이제 각자가 내놓을 차례다.

/원광대학교

[2018년 10월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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