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산 최성덕 원로교무

[원불교신문=정성헌 기자] "지금 일본 오까야마·치바법인 사태를 바로잡지 못한다면 앞으로 수백 년 이어나가야 할 해외교화의 희망은 없다."

독일 프랑크푸르트(Frankfurt)교당을 개척해 최초 유럽교화의 물꼬를 열었던 주산 최성덕(71·周山 崔性德) 원로교무. 원불교 해외교화의 효시로 기록되고 있는 일본(원기20년·1935)에서 이같은 사태가 발생하고도 여전히 교단적 책임과 해결 의지가 없다는 것에 대한 깊은 우려였다. 그 우려에는 그를 비롯해 그동안 혈혈단신으로 낯선 이국땅에서 갖은 설움과 노역으로 해외교화 개척사를 일궈낸 해외교역자들의 숭고한 삶들이 중앙 부처의 관리 소홀로 하루아침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는 한탄도 담겨 있었다.

일본 오까야마·치바법인 사태의 본질
"전 세계에 나가있는 교역자들은 그 나라 법인의 이사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인이나 교당을 사고 팔 수 있는 전권을 갖고 있다. 일본 오까야마·치바법인 사태에 대한 명확한 책임과 기강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그런 사례가 안 생긴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나."

일본 오까야마·치바법인 사태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는 지적이었다. 일본 오까야마·치바법인 사태는 원기76년 오근진 교도가 단독으로 설립한 치바법인과 교당을 교정원이 인수한 뒤 파견한 김상원 교무의 무단 대출·횡령과 잠적, 원기79년 오까야마법인 대표역원으로 있던 오오끼가 잇다른 사업실패로 교단몰래 ㈜나기사석재 기노시다 가스시로 사장에게 팔아넘기면서 문제의 발단이 됐다.

"새 종법사와 지도부는 어떻게 해서든지 일본 법인들을 하루빨리 환수해서 지금이라도 역사의 오점을 바로잡아야 한다."

목탁소리와 독경소리
군산에 태어난 그는 태전그룹 창업자인 오철환 종사(喜山 吳喆歡)의 옆집에 살았다. 당시 태전약국을 운영하던 오 종사는 1년에 몇 차례씩 그와 함께 살던 친할머니를 찾아와 "원불교에 같이 가서 점심 드시고 옵시다"라며 교당에서 점심공양을 같이하곤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4축2재 때만 되면 이웃을 챙겨 교당으로 인도했던 것이다.

또 그가 외가집에 갈 때면 천도교 신자였던 할머니가 새벽마다 시천주를 외우던 모습을 보며 자랐다. 그러다가 그가 초등학생 시절부터 불법연구회(원불교 전신)를 믿기 시작했던 할머니는 '보은미를 내야 한다'며 어린 손주 손을 잡고 한손으로는 머리에 쌀을 이고 만석리부터 5㎞나 떨어진 회관(익산 총부)까지 함께 걸어간 기억도 새록새록하다.

"할머니 따라 회관에 가면 대각전 옆자리에 앉혀놓았는데 법회를 본 것 같아. 근데 어른들이 다 '심지는 요란함이 없건마는, 심지는 어리석음이 없건마는' 하길래, 무슨 등잔불 심지를 찾는가 했지."

친가에서도 외가에서도 새벽 목탁소리와 일원상서원문 독경소리, 그리고 어른들의 이쁨을 받고 자란 그는 원불교에 자연스레 젖어들었다.

잊을 수 없는 정산종사의 파안대소
현재 익산 원병원 자리에 익산교당이 있던 시절, 신심이 깊었던 외할머니(순타원 곽강연화)는 주무로 왕성한 활동을 떨치고 있었다.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되던 해, 외할머니는 갑자기 "오늘은 할아버지를 좀 보러 가야 되겠다"며 그를 총부 조실로 데려갔다. 돌로 반듯하게 놓아져 있는 길을 따라 간 곳은 종법실이었는데 들어가보니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 있었다. 외할머니가 "할아버지께 큰절하고 인사드려라"고 하니 영문도 모른 채 이마에 손대고 인사를 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본 할아버지는 파안대소했다. 정산종사였다. 그날 정산종사의 웃음과 인상은 지금까지 두고두고 잊지 못할 추억이 됐다.

서울로 진학해 고등학교에 다니던 중, 그는 큰 도로변에 원불교라 써진 말뚝을 보고 어릴 적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고향을 찾은 듯한 느낌에 곧장 그곳을 향하니 서울교당이었다. 당시 유성일 교무와 박정묵 교무, 이운권 교무가 근무하고 있었다. 그때 학생회원들이 70~80명이었는데 그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울교당 7대 학생회장으로 당선돼 활동했다. 그 시절 교당활동은 그가 자연스레 출가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지금 유럽이 텅텅 비어있다
원기59년 첫 부임지로 전주교당에 발령받았다. 이어 원기62년 원광대학교에서 숭산 박광전 총장을 모셨다. "어느 날 아침, 일정보고를 하고 나니까 총장님이 '성덕, 아무리 봐도 자네는 일선 교당에서 일할 인물이지 학교나 기관에서 근무할 인물은 아니네'라고 하셔. 간절히 말씀하시더라고. 그때 숭산 종사께서 내 마음에 돌을 하나 던져놓으신 거지."

숭산 종사의 한마디는 그를 크게 흔들었다. "아, 그렇구나. 일선에서 근무해보자. 진짜 뼈 빠지게 고생해보자. 그러려면 해외교화로 가자.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당시 원광대학교 부총장이자 국제부장을 겸임했던 아타원 전팔근 종사를 찾아가 고민을 상담하니 "미국은 교무들이 더러 나가 있으니까 유럽으로 가라.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처럼 인류문명에 앞장섰던 좋은 나라들이 많은데 유럽은 텅텅 비어있다"고 제안한 것이다.

막막한 현지에서 짐꾼으로 시작했다
1980년대만 해도 국내 경제적 상황과 여러 가지 이유로 외국에 나가는 여건이 참 힘들 때였다. 그 어려웠던 시절에 그는 김덕성 정토회원과 세 자녀를 데리고 이역만리 독일교화를 떠났다. 당시 있던 집도 "교화사업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면 영광이겠다"며 기꺼히 처분하고 함께 따라나선 김덕성 정토회원의 힘이 무엇보다 큰 원동력이 됐다.

국민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인 독일의 교화란 쉽지 않는 일이었다. 우선 그는 교민들이 이사한다고 하면 한걸음에 달려가 이삿짐을 옮겨줬다. 그 집에서 수고비를 주려고 해도 받지 않고 "원불교 프랑크푸르트교당에서 열리는 법회에 한 번 들러 주세요"라는 말만 남겼다.

성실하고 인심 좋은 교무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장기 출장을 가야 하는 교민 사업자가 창고를 맡아달라는 부탁도 들어줬다. 그가 떠나고 창고를 살피려고 문을 열어보니 정리도 안 된 물건들이 너저분하게 있었다. 성격상 그 광경을 내버려둘 수 없어 열흘에 걸쳐 창고를 정리하고 청소했다. 돌아온 사장이 깜짝 놀라며 돈으로 감사함을 전하려 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그러자 교당에 피아노 한 대를 희사했는데 지금도 프랑크푸르트교당에서 사용하고 있다. 교민들 사이에 그의 선하고 쾌활한 인품이 점차 알려지면서 교도들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가족들도 헌신적이었다. 정토회원은 남편을 도와 어려운 교당 형편을 속에서 살림을 책임졌고, 장녀인 고은은 매주 법회 때마다 피아노 반주를 도맡아 법회 진행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나머지 자녀들도 힘 미치는대로 어린이법회 등에 정성을 쏟으며 교화활동에 일조했다. 이러한 정성으로 독일교화 6년만에 프랑크푸르트교당이 될 대저택을 구입했다.

현재 독일 교화의 초석 다지다
가화만사성이라 했던가. 가족이 일심으로 교화를 돕다보니 독일 교화의 활로가 보이기 시작했다. 독일로 유학온 원광대학교 학생들의 요청으로 퀼른대학교 대학생 출장법회가 열리게 됐고, 전북대학교 봉현철 교수(대치교당·법명 명근)의 기연으로 레겐스부르크 출장법회까지 인연이 닿았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각각 250㎞, 343㎞나 떨어진 퀼른대학교와 레겐스부르크에 10년동안 법회를 보러 다녔다. 몸이 고되고 힘들었어도 레겐스부르크에서 만난 페터 스탑나우(Perter Stabau)와 인연이 돼 그가 원법우(圓法雨·레겐스부르크교당)로 법명을 받고 유럽인 최초로 출가한 일은 정말 잊지 못할 기쁨이자 큰 보람이었다.

그가 프랑크푸르트에 정착한 지 10년차 되던 해, 1990년 베를린이 통일된다. 원불교가 독일 수도에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그는, 당시 좌산 종법사가 마련한 건축기금과 총부 조력으로 당시 집값이 저렴했던 동독 베를린에 아파트를 사서 베를린 선교소를 지음으로써 현재 독일 현지교화에 초석을 다졌다.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 김우중씨 말대로 지금이 그러한 때다. 원불교 1세기는 여성교역자들이 홀홀단신으로 개척해왔던 시대라면 2세기는 남성교역자들이 적극적으로 개척과 창립의 역사를 짊어져야 한다." 여성교역자들이 일궈놓은 기반에 남성교역자들이 거기에 머물러있지만 말라는 이야기였다. 보다 적극적으로 남성교역자들이 오대양육대주 해외교화에 당당히 나서야 한다는 부촉이기도 했다.

그는 나지막이 감회를 전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원불교 교무가 된 것도 영광인데, 유럽교화 첫 번째 교무로 유럽개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을 새긴 것은 사무칠 정도의 기쁨이자 영광이지 않나."

[2018년 10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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