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종교는 세상을 움직이는 수레의 두 바퀴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한 마음은 원석 잘 가공한 보석

[원불교신문=김경일 교무] 과학문명의 진보가 눈 부시다. 며칠 전 폰을 교체했는데 음성인식(AI)으로 움직이는 '빅스비'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하이 빅스비!"하고 말하면 언제든지 반짝반짝하며 주인의 지시를 기다린다. 

아직은 초보단계라 서비스에 한계가 있지만 2~3년 후면 누구나 다 AI비서 한명씩을 데리고 다니는 세상을 보게 될 것 같다. 지금은 역사이래 인류가 빈곤과 무지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시점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풍요와 편리함의 극치를 맛보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밖으로 과학문명이 발전하면 할수록 안으로 암울한 인류 미래가 점쳐지고 있다. 핵전쟁, 기후변화, 환경재앙, 생명의 경시, 강약과 빈부와 성의 차별,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의 증가 등등 실로 풀어야 할 과제가 막막하다. 

대종사께서는 왜 과학과 물질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세상의 병맥(病脈)은 더 깊어진다고 하셨을까? 당신의 제생의세 경륜을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로 전면에 내걸었을까? 

세상은 거대한 무위자연의 시장(市場)이 한 축이다. 모든 의식주는 시장의 거래와 교환으로 가능하다. 시장의 거래와 교환은 화폐가 수단이다. 그래서 세상은 화폐의 많고 적음에 따라 강약과 빈부가 발생한다. 그 병맥을 세밀하게 추적해 보면 다름 아닌 '돈의 불균형'이다. 이것을 대종사께서 '돈병'이라고 하셨다. 돈병은 근본원인은 욕심이다. 돈병은 탐욕에서 온다. 과다한 욕심·분수를 벗어난 이기심이 그 원인이다.

돈은 의식주를 문명시킨 일등공신이면서 동시에 세상을 파란고해(波瀾苦海)로 함몰시키는 주범이다. 그래서 돈은 매우 정교하게 절제되고 통제되어야 하는 대상이 된다. 그것을 위해서 세상에는 정치가 있고 종교가 있다. 대종사께서는 '정치와 종교는 세상을 움직이는 수레의 두 바퀴'라고 하면서 이 두 바퀴의 역할에 따라 '창생의 행과 불행'이 좌우된다고 했다.  

그런데 최근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한국사회에서 가장 불신 받는 첫 번째 그룹이 정치인이고 두 번째가 종교인이라고 한다. 두 바퀴에 다 문제가 심각한 것 같다. 

우선 내가 몸담고 있는 종교가 이렇게 세상의 불신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때때로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 최근 이웃종교의 종권다툼이나 교회세습분쟁을 보면 정치 못지않게 세속화된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내부도 우려될만한 조짐이 보인다. 

요즘 교화현장에서 보면 특이한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교전을 보고 호감이 많다고 하면서도 입교하자고 하면 주춤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종교보다 영성(靈性)에 관심이 많다. 선(禪)보다 명상에 더 관심이 많다. 진리, 영성, 마음 등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니다. 현대인들은 역설적으로 종교에 목말라 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지금 사람들은 종교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종교현상을 거부하는 것이다. 사회학자들 견해에 의하면 앞으로 탈종교시대가 온다고 한다. 종교가 교세로 세상을 제압하려 하고 신자들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옭아매 군림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어둠이 밝음을 이기지 못하듯 형식으로 본질을 호도하지 못한다. 종교왕국은 지나간 패러다임이고 허세다.  

우리가 세상을 교화한다고 하면서 정작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암담할 때가 있다. 큰 교당도 있고 작은 교당도 있다. 일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상관이 없다. 일이 많으면 많은 대로, 일이 없으면 없는 대로 공부하면 된다. 공부라고 하니까 어려서부터 공부에 진절머리가 난 사람들은 아예 외면할 지도 모르겠지만 난 여기에 큰 묘미를 느낀다. 어떻게 공부하라고? 이게 관건이다. 일이 있으면 그 일(경계)을 따라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는 공부를 하면 된다. 그럼 묘용(妙用)이 된다. 

절도에 맞는 성취의 기쁨이 크다. 일(경계)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 일이 없으면 분별하는 마음도 없다. 한 마음도 없는 그 자리가 참 성품자리다. 그 자리에 계합(契合)하는 재미가 참 수도의 맛이다. 요란한 바람이 불면 큰 파도를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파도가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그 파도를 따라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면 된다. 바람이 잠자면 파도도 잠 잘 것이니 그냥 고요함조차 없는 고요함을 즐기는 낙을 무엇에 비유할까? 이것이 동정일여(動靜一如) 동정삼매(動靜三昧)의 무시선 공부다. 

없는 마음이 금강의 원석과 같은 것이라면 일을 따라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는 마음은 다이아몬드 원석을 잘 가공한 보석들과 같다. 이게 진리의 체와 용에 맞게 사는 삶이고 속 깊은 마음공부고 성리를 물처럼 부려쓰는 공부고 세상을 궁하지 않게 사는 묘술이고 세상을 옹졸하게 살지 않는 대법(大法)이다.  

우리 교단도 거대한 자본주의 물결을 지내오면서 알게 모르게 때가 묻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말이다. 종교가 세상을 교화하다보면 불가피하게 때가 묻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때 묻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때가 묻은 줄을 모르거나 알아도 때를 닦아내려는 의지가 없다면 그것이 큰 문제다. 때 묻음은 오히려 우리가 쉬지 않고 정진해야 할 근거가 된다. 경계가 올 때마다 공부할 때가 돌아온 것을 염두에 잊지 말고, 끌리고 안 끌리는 대중만 잡아갈 것이니라. 동정간 끊임없는 수행의 비결이다. 우리 회상은 물욕에 전도된 세상을 책임지기위해 법계로부터 인증과 사명을 받았음을 자부하고 있다. 이런 일을 어떻게 누군가가 시켜서 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에게 물을 일이다.

/경남교구장

[2018년 10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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