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모습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한 결과
지금 하는 일은 미래 우리가 받게 될 것

[원불교신문=백인혁 교무] 내 뜻대로 무엇을 해 보려고 아버지께 말씀을 드리면 아버지는 "아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반대를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여줘보면 아버지는 차근차근 왜 안되는지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일러주셨다. 그런 아버지의 가르침을 통해 어린 시절 무슨 일을 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먼저 아버지께 여쭤보는 습관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됐다. 

살다 보면 내 뜻대로 안 되는 일들이 부지기수다.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특별한 서원으로 일원대도를 함께 배우고 익히며 도반들과 더불어 살아가야하고, 이 법을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하는 원불교인으로서 삶은 더 그렇다. 과거에는 전혀 몰랐던 사람들과 공중사를 같이 하는 마당에 어찌 내 뜻대로 할 수 있겠는가? 대중이 같이 일을 하자면 자연히 계획이 세워져야 할 것이고, 그 세워진 계획은 아무리 우수한 두뇌를 가진 사람들이 세웠다 해도 실행에 다 적합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수립된 계획을 실행해야 하는 자리에 명을 받아 가서 수행하다 보면, 도저히 진행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히는 경우가 어찌 없을 것인가. 이럴 때는 스승을 찾거나 이미 경험한 선배, 더 나아가 좌우 동지들에게 물어서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물을 수 있는 통로를 대종사는 '열 사람의 법을 응하여 제일 좋은 법으로 믿을 것이요'라고 했다. 정산종사도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물어서 했다고 했으며 대산종사는 "나는 대종사와 정산종사를 항상 모시고 여쭤서 그 일을 수행했다"고 했다. 교단에서는 대중과 함께하는 그 제도적 장치를 '소관 회의'라 볼 수가 있다.

우리 교단도 2대를 마감하고 3대를 맞이하면서 소관 회의를 통해 많은 출·재가 교도들이 머리를 맞대고 심사숙고해 3대 계획안을 마련했다. 3대에 들어서서는 그 계획안에 따라 각자 맡은 바 현장에서 열심히 신앙 수행을 했는데 이제는 교단 100년을 넘어 3대를 마감하고 4대를 다시 설계해야 할 시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지금 3대를 돌아보면 처음 계획했던 대로 진행된 부분도 있지만, 여러 가지 사정상 계획을 수정해 진행한 것도 있고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다른 방안을 마련해 대체한 것도 있을 것이다.

이제 눈앞에 4대를 설계하는 일이 우리들의 일이 됐다. 다시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과거 1·2·3대를 돌아보고 바르게 가고 있는 분야는 계속하고 변형된 부분은 근원을 대조해 현실에 맞게 다시 설계하고 미래를 살펴보아 어떻게 일원 대업을 실현해 나갈 것인지 세심하게 설계해야 한다.

좋은 집은 들어가 살 사람의 마음에 맞아야 하듯, 좋은 설계는 대종사 본의가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그리고 시대를 따라 지도한 역대 종법사들 취지와 지금 신앙 수행하고 있는 교도들의 서원인 성불제중이 성취되도록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입문할 교도들, 나아가 세상 모든 사람이 이 회상에서 제도 받아야겠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면들이 담겨야 할 것이다.

이렇듯 교단 4대의 설계는 한 개인이나 한 가정의 범위를 벗어나 많은 대중이 함께하고, 만생령이 동참하도록 하는 막중한 일이다. 모든 재가출가 교도들이 서로서로 지혜를 모으고 뜻은 합할지언정 어느 한 개인의 주장을 내세울 일은 아니라 본다. 

또한, 이 일이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서로 달려들어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을 해야지 남 탓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서로서로 경험 있는 사람들에게 조언도 구하고 온통 매달려 지혜를 모아야 할 일이다. 누군가가 알아서 해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같이 동참해 고민하고 격려하다 뭔가 좀 부족하다 싶으면 중지를 모아 보완해 나갈 때 그래도 좀 더 나은 계획안이 마련될 것이다.

지금의 우리의 모습은 그간 우리가 열심히 노력한 결과이고 지금 하는 일들은 미래에 만들어지는 우리들의 모습이 될 것이라 하신 대종사의 천도법문을 다시 새겨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천도법문이 열반 전후에 들려주는 법문이기도 하지만, 지금을 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살면서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해야 할지 삶의 지혜를 밝혀 주고 있는 법문이기 때문이다.

/충북교구장

[2018년 10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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