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지은 교무] 이동안이 열반하자, 소태산 대종사는 한참 동안 묵념한 후 눈물을 흘렸다. 제자들의 "너무 상심하지 마옵소서"라는 말에, 대종사는 "마음까지 상하기야 하리요마는 내 이 사람과 갈리면서 눈물을 아니 흘릴 수 없도다"라고 말씀한다. 

도산 이동안 선진은 보화당을 창설해 교단 산업계의 선구자 역할을 했고, 신용과 정성을 신조로 손대는 사업마다 번성시켜 영육쌍전 이사병행의 교단기초를 닦았다.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을 신조로 상하구별 없이 누구를 대하든 그 특성을 알아 자비롭게 지도했다. 이런 도산이 장티푸스로 위독해지자 대종사는 "동안을 살릴 의사만 있다면 불법연구회의 절반을 주겠다"고 할 정도로 그를 아꼈다. 제자를 아끼는 대종사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미국에서 불교나 명상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 가운데,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 emptiness)에 대해 두려운 느낌이 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것도 없다'라는 뜻을 가진 공(emptiness)을 추구하는 것이 명상이라고 하니, 우리 마음에 아무런 감정도 없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다. 

대종사가 보여준 모습을 보면, 깨달은 성인이라 하여 희로애락의 감정 없이 언제나 담담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팔산 김광선 선진이 열반할 때도 대종사는 눈물을 흘리며, "이십여 년 동안 고락을 같이하는 가운데 말할 수 없는 정이 들었는지라 이제 다시 그를 대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어찌 섭섭하지 아니하리요"라고 한다. 자비로운 성인이라 화내는 법이 없었을까? 대종사는 평상시 자비로운 모습이지만, 한번 노기를 띠면 감히 그 안전에 설 사람이 없었다. 

성인과 범부의 차이는 희로애락의 감정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감정에 끌리는가, 중도를 잡는가에 있다. 이청춘이 "정산이 자녀를 사랑하오니 그것은 애착심이 아니오니까" 하고 묻자 대종사 답하기를 "청춘은 감각 없는 목석을 도인이라 하겠도다"고 하며 "애착심이란 사랑에 끌리어 서로 멀리 떠나지를 못한다든지, 갈려 있을 때에 보고 싶은 생각이 나서 자신 수도나 공사에 지장이 있게 됨을 이름이니, 정산은 그러한 일이 없다"고 답한다. 

〈중용〉에 '희노애락지미발(喜怒哀樂之未發)을 위지중(謂之中)이요, 발이개중절(發而皆中節)을 위지화(謂之和)'라는 말이 있다. 희로애락의 감정과 분별이 발하기 이전 깨끗한 마음상태를 중(中)이라고 하며, 중(中)에 바탕해 희로애락의 감정과 분별을 내되,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 대산종사는 솔성을 잘하기 위해서 이 중화(中和)의 표준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한 제자가 대산종사에게 "죽은 딸 생각에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걱정입니다"라고 하자 "눈물이 나온다고 공부 잘못하는 것으로 걱정하지 말라. 천륜인데 눈물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에 얽매어 할 일을 못하면 안된다. 부처님도 눈물을 흘리신다. 그러나 자유자재하신다"고 말했다. 

기쁘고, 슬프고, 화나고, 즐거울 때, 그 일어난 마음을 간섭할 것이 아니라, 그 일어난 마음에 끌려 해야 할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마음을 챙기는 것이 공부인의 자세인 것이다.

/미주총부법인

[2018년 10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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