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삶의 흔적은 허공에 기록되고 있다. 그런데 굳이 일기를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핵심은 영육쌍전과 이사병행의 가르침을 몸과 마음으로 실천해 자신의 삶을 복혜 구족한 낙원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일기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발명품이다. 동서양에서 일기는 수입·지출의 대조를 위한 기록에서 출발했다. 그것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자기성찰을 위한 기록으로 변모했다. 예를 들자면, 16세기 말부터 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 확립과 자아성찰을 위한 일기를 쓰고 있다. 신앙심을 깊게 하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동양에서도 지식인들은 기(記)·일기(日記) 또는 록(錄)·일록(日錄)으로 기록을 해왔다. 명칭에 따라 다양한 변주를 보여준다. 오늘날 이 기록들은 정치경제사가 다 보여주지 못하는 당대의 풍속, 문화, 생활에 관련된 살아 있는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어떠한 삶을 살든 인간 개개인의 삶은 영적 진화를 위한 도정에 있다. 일기는 완전하고 온전한 삶에 이르기 위한 여정을 보여주는 내밀한 자기 고백인 것이다. 즉 자신 및 진리와 대면하는 주관적 진실의 장이 일기다. 그렇기 때문에 형식으로부터도 자유롭다. 

그런데 이 〈정전〉의 일기법은 궁극의 뜻이 일반적인 일기와 맞닿아 있지만, 불법을 현실화한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가진다. 프랑스의 철학자 폴 리쾨르에 의하면, 일기에는 이야기하는 자아와 이야기되는 자아가 있다고 한다. 일기법에서는 두 영역의 긴장감이 잘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일기법이 주는 효과다. 삶을 상시와 정기훈련으로 나눈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영혼은 진급을 위한 끊임없는 과정 속에 있다. 인생은 성숙을 위한 훈련과정이다. 실수나 실패로 인해 삶이 더욱 풍요로워지듯이 우리는 한 방울의 물이 마르지 않도록 넓은 대해(大海, 진리와 우주의 품안)로 가는 여정에 있다. 

일기 기재과정에서 느끼듯이 진아(眞我)는 분화된 자아의 다양한 모습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있다. 일기는 자아의 분신인 가아(假我)가 매일매일 행하는 모습을 스스로 점검한다. 이 과정이 성숙될수록 가아는 진아에 가까워진다. 이 과정을 일기를 통해 반복하면서 진아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 수없는 생애 동안 켜켜이 쌓인 업장을 해소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일기는 이러한 업장을 녹이는 과정이며, 그 해소 과정에서 샘솟는 지혜를 통해 자신의 무명을 밝혀나가는 행위다. 우주와 일체가 되어 있는 진아에 다가가는 길이 일기법인 것이다.  

상시일기는 하루 동안 행한 유·무념 처리, 학습상황, 계문의 범과 유무를, 정기일기는 매일 실천한 작업시간 수, 수입 지출, 심신작용의 처리 건, 감각감상을 기록한다. 이 과정을 살펴보면, '육근과 정신이 어떻게 실질적이며 진리적으로 자신을 단련시키고 있는가' 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양자의 일기는 마음공부를 전방위적으로 실천하는 프로그램과 같다. 잡으면 있고, 놓으면 없어지는 마음의 뼈를 더욱 튼튼하게 하고 있다. 그 구조는 삼학에 기반하고 있지만, 최종적으로는 일거수일투족 깨달음을 통해 진리적 정의(正義)를 정신과 육근이 실천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필기구를 들고 일기의 공백과 만나는 순간은 깨어나는 시간이다. 참 자기와 허심탄회한 대화가 시작되는 순간인 것이다. 

/원광대학교

[2018년 10월26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