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지은 교무] 얼마 전 뉴스에 술에 취한 할아버지를 구한 반려견 '똘이'에 대한 기사를 봤다. 70대인 주인이 술에 취해 추운 밤에 몸을 못 가누고 길바닥에 주저앉자 똘이는 계속 짖어대며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주인 곁을 지켰다.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하자, 똘이가 앞장서서 안내하듯 길을 알려줘 집으로 안전하게 데려다 줄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일들을 들으면, 말 못하는 짐승이라 하여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겠다는 경각심이 든다. 

몇 년 전 중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농가에서 새끼 곰이 산채로 쓸개즙을 채취당하며 고통스러워하자, 어미 곰은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해 철창을 부수고 탈출해 새끼 곰의 쇠사슬을 끊으려 했다. 하지만 쇠사슬을 끊을 수 없었던 어미 곰은 새끼 곰을 꼭 껴안아 질식시켜 죽이고, 자신도 벽에 머리를 들이받아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동물도 제 자식을 사랑하며, 슬퍼하고 기뻐하는 감정이 있다. 

불법 연구회 시절, 총부에서 기르던 어린 개가 동리 큰 개에게 물려 죽게 돼 처량하게 비명소리를 냈다. 소태산 대종사가 그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생명을 아끼어 죽기 싫어하는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똑같다"하며, 불쌍히 여기는 기색을 보였다. 그 개가 결국 죽자 재비를 주어 예감(禮監)으로 하여금 천도재를 지내도록 했다.

필자가 미주 선학대학원에 입학한 첫 해, 미국인 교도가 개의 천도재를 지내게 됐다. 처음에는 개의 천도재를 지낸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고, 개의 이름을 영가처럼 부르는 것도 좀 우습기도 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주인을 보니, 사람이 정을 나누고 교감하는 데에는 개나 사람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느꼈다. 요즘은 반려견이 가족의 동등한 일원과 같이 대우 받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반려견의 천도재 또한 원불교 의식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을 충분히 예측할 수가 있다. 대종사가 죽은 개의 영혼을 위해 칠칠 천도재를 지내도록 한 것은 좋은 표본이 될 만하다. 

'살생을 말며'는 보통급 첫 번째 계문이다. 이는 단지 짐승이 전생에는 나와 인연 있는 그 누군가였을 수도 있다는 윤회설에 바탕한 것만은 아니다. 짐승도 사람과 같이 아파하고 고통스러워 한다는 동기연계 사상에 바탕하고 있다. 

대산종사는 "나는 한 때 내 처소에 한 짐승이 조용히 다녀간 것을 보았으나 혹여 동네사람에게 해를 당할까 염려하여 지금까지 비밀에 부쳤노라"고 했다. 정산종사는 한 교도가 약용으로 산 잉어를 바치니 "죽은 것은 없더냐"하고 못에 놓아기르게 했다.  

그렇다면 원불교에서는 육식을 금하고 있는가? 계문에서 '연고 없이 '사육(네발 달린 짐승의 고기)을 먹지 말라'고 해 건강상의 이유 등 연고가 있을 때에 한해 제한적으로 먹도록 하고 있다. 또 이를 다시 해석하면, 육식을 전적으로 금하는 것은 아니지만, 식탐으로 인해 육식을 즐길 것은 못 된다는 뜻이다. 정육점 유리창을 부수는 등 근래 프랑스 채식주의자들의 폭력적인 시위를 보면, 일부 채식주의자들이 생명존중 사상을 너무 좁게 해석하는 것 아닌가 싶다. 우리 스스로 그 본의를 알아 잘 실행해야 할 것이다. 

[2018년 11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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