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 구애없는 인과 진리 의미
〈불교정전〉 원문은 '반야지'로 직접 표현

[원불교신문=최봉은 원무] 우리 어리석은 중생들이 마음을 사용할 때 어찌하여 원만구족하지 못하는가 하면 탐진치(貪瞋痴)가 들어 가리운 연고라, 사람에게 이 탐심이 가리고 보면 바르게 보고 듣고 말하지 못하여 전(顚=전도몽상)을 하고, 또 진심 역시 그러하여 진심이 끓을 때에는 좋은 말도 바르게 들리지 않고, 자신의 말도 바르게 나오지 않으며, 치심 역시 그러하여 안으로 이 삼독의 불이 타는 까닭에 증애, 선악, 고락의 분별을 일으키나니, 그러나 안으로 이 삼독심이 잠들면 매매사사가 자연히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처리로 나타나게 되나니라.(<정산종사 법설>9.일원상법어)

진리는 눈에 티가 없어서 가리움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지은 바를 다 보고, 틀림없이 바르게 보아 있는 그대로 다 나투어 주고, 호리도 틀림없이 바르게 나투어 준다. 진리의 이 속성을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다'고 하며 '응용에 무념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진리가 만약 무엇에 가리워 있다면, 다 볼 수가 없어서 원만구족하게 다 나투어 주지 못하고, 바르게 볼 수가 없어서 지공무사하게 바르게 나투어 주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원만구족하지 못하다는 말은 업의 장애로 인해 뭔가 부족한 상태를 말하며, 지공무사하지 못하다는 말은 반공반사나 지사무공한 상태를 말한다. 수행을 하는 목적은 우리도 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진리를 체받아서 눈을 사용할 때 '분별과 주착 없이 다 보고', '틀림없이 바르게 보자'는 것이요, 귀·코·입·몸·뜻에 있어서도 또한 이와같이 하자는 것이다. 이를 <금강반야바라밀경>에서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 했고, <정전> 무시선법에서는 이를 인용했다.

흔히 <정전> 가운데 일원상서원문의 '원만(圓滿)'과 일원상 수행이나 일원상 법어의 '원만구족(圓滿具足)'의 뜻을 다르게 생각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사용한다'는 말은 곧 '원만하게 사용한다'는 말에 다름이 아니다.

<정전>의 전신인 <불교정전(佛敎正典)> 일원상의 수행에서는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하는 동시에 수행의 표본을 삼아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 즉 반야지(般若智)를 알자는 것이며,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 즉 반야지를 양성하자는 것이며,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 즉 반야지를 사용하자는 것이 곧 일원상의 수행이니라'고 밝혔다. 이는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이 곧 '반야지'임을 나타낸다는 뜻을 첨언함으로써, 초기에는 그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더위잡을 수 있도록 설명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진리는 응용에 무념하다. 그래서 육근을 사용하는 사람 마음이 원만구족하지 못하고 지공무사하지 못한 마음이든,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마음이든 행위자의 마음 그대로 일호의 사심없이 나투어주니 이것을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러한 진리의 표현을 잘못 이해하고 엉뚱하게 해석해서는 안된다. 예를들어 어떤 사람이 욕심에 눈이 가리워 상대를 속이려는 마음으로 사기 행각을 벌였다고 해보자. 이때 그 사람이 마음먹은 바가 행동으로 발현되는 진리적 현상을 '원만구족 지공무사'로 풀이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의 속이려는 마음이나 사기 행각 자체를 '원만구족 지공무사'라고 해서는 안된다. 즉 선악에 구애없이 인과대로 은현하는 진리의 속성을 설명하고자 할 때 사용되는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다'는 표현을, 탐진치에 가린 마음이나 행위 자체를 두고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다'고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앞에서 언급한 '반야지' 첨언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탐진치에 가리운 마음이나 행위'는 이 반야지가 업장의 가리움을 받은 상태다. 따라서 원만구족하지 못하고 지공무사하지 못하게 사용한 마음이며, 이 마음으로 행한 행위 역시 원만구족하지 못하고 지공무사하지 못한 행위인 것이다.

/남부민교당

[2018년 11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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