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19-10-17 15:07 (목)
교무반성문
교무반성문
  • 정인화 교무
  • 승인 2018.11.01
  • 호수 19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교무가 변해야 교단이 산다
한번 교무는 영원한 교무인가

[원불교신문=정인화 교무] '교육의 질은 교사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는 해묵은 명제가 있다. 이 말은 교육이 양질의 프로그램이나 세련된 시설을 갖췄다 해도 선생님의 능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실행이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고 설령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있다 하여도 교사의 질이 떨어지면 교육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의미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교무는 교사이고 교도는 학생이라는 등식이 성립돼야 하는데 우리는 교무와 교도가 동등하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현실은 교무와 교도 사이가 상하관계로 자리잡힌 지 오래다. 교당의 실제 분위기가 그러하고 재가들의 투표권 제한이 이를 잘 말해준다. '교도의 수준은 교무를 넘을 수 없다'라고 한다면 교무가 변해야 교도와 교당이 발전하고 교단도 살아난다는 결론이다.

깨어있는 교도들이 하는 말은 '우리 교무님들이 기도로는 목사님을 못 넘고 수도로는 스님들만 못하다'는 말들을 한다. 새벽·철야·금식기도에 작정기도까지 그들은 기도로써 개인의 신앙을 다지고 성도와 국가와 인류를 위해 정성을 드린다. 매사가 기도로 이루어지고 음악으로 감성을 정화하고 은혜와 감사를 나누는 일이 일상화 되어 있다. 스님들은 새벽 예불과 경건한 공양의식은 물론, 범패와 독경으로 불성을 다지고 동·하선으로 근기를 바룬다. 반면에 우리는 대종사의 초월적 수행과 뛰어난 실천에 의지해 의식과 관념으로는 이들을 뛰어넘은 듯 말하지만 실제로는 먹고 자는 것에서 기도와 상담, 교육과 교화, 관리와 경영에서 실생활로 이어지지 못한 채 살아간다.

종교인에게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은 진리는 관념적이나 현실은 감정이 지배한다는 뜻이다. 교당에서 한창 일해야 할 속깊은 교도들이 개인의 수도는 물론이려니와 교당 일에 미온적인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는 쉬운 곳에 있다. 우리는 개인의 신앙을 대부분 인과와 책임으로 규정짓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흉금 없는 대화를 나눠보면 공부로 분별심을 높이는 일 못지 않게 위로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은 욕구가 훨씬 솔직한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용서와 관용보다는 '한번 찍히면 끝'이라는 단죄의 '주홍글씨'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소태산은 좋은데 감성이 부족한 교무와 소통 없는 교단의 분위기에 질식하여 소리 없이 사라져가는 교도들이 많다는 하소연이다. 교무들이 상대의 감정을 헤아리고 교감하기보다는 법과 공부에 치우쳐 제도는 지킬 수 있을지 모르나 사람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더 이상 반복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고 법과 제도도 감정이 만든다'는 말을 되새겨 볼 때다.

과거에는 성직자가 비성직자보다 평균적인 지적 역량과 지도력이 앞섰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지식과 정보의 습득과 학습 방법이 용이해진 지 오래된 요즘엔 우리도 교무와 교도 사이의 능력이 대등하거나 오히려 세상살이에 능한 재가들의 역량이 앞선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지식, 윤리, 리더십 모든 면에서 진정한 평등의 시대가 왔음을 자각하여 출가자로서 티끌만한 우월감이나 권위의식이 있다면 과감히 버리고 사람의 가슴에서 울려나오는 울림과 풀벌레들의 소리에도 귀기울여야 한다.

사실 우린 규범에 치우친 '윤리적인 사람다움'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21세기의 세상을 견인할 수 없다. 탈종교시대의 지적 혼돈을 수습하고 감성을 정화시켜 참다운 인간의 전인성과 신인합일의 영성시대를 열어갈 새로운 패러다임에 눈뜨고 실천할 통섭의 인간이 우리가 바라고 대종사가 그리던 교무의 모습, 나아가 소태산의 제자가 가야 할 길이 아니겠는가.

수도인과 지도자는 끊임 없는 성찰과 공부가 필요하다. 시대에 맞아야 하고 생활에 적용하며 사람들과 더불어 교감할 수 있는 역량을 죽을 때까지 갈고 닦지 않으면 제도에 의하지 않아도 자연 도태된다. 그래서 이젠 우리 차례인 거다. 능력있고 겸손한 수위단이 구성되고 소통을 강화하고 교화와 교육의 제도를 완비해도 교무가 변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다. 역동적 힘을 잃은 현하의 교당과 교단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우선은 교무다. 내가 죽어야 교당이 산다, 아사교당생(我死敎堂生)이다.

/마산교당

[2018년 11월2일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