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혜성 교무] 그날은 이상하게 한가했다. 중앙총부에선 총회가 있었고, 회의에 참석한 주임교무를 대신해 일반법회 설교를 했다. 교도들은 또랑또랑 귀여운 부교무의 설교를 기꺼이 들어줬다. 그리곤 법회를 마치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주임교무가 부재하니, 교도들이 썰물처럼 교당을 나선다. 그래서 난 오후 한시부터 혼자 있었다. 

일요일 오후가 이렇게 한가하다니, 누가 슬쩍 내게 선물을 놓고 간 것처럼 기뻤다. 행복이 별거 아니란 생각도 든다. 더할 나위 없는 만족을 느끼고, "그만 쉬어도 되겠다"하며 시계를 본다. 여태 5시가 안됐다. 이젠 되려 난감하다. 무슨 일이든 해야 할 것 같다. 할 일은 없는데 '일'을 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이 든다. 여백이 길어지자 정작 당황스럽다. "아, 난 쉴 줄도 모르는구나. 이건 온전함이 아니다. 이 시간을 온전히 보내자." 저녁을 먹고, 노란 등불 하나를 켜고 음악을 틀었다. 좋아하는 재즈가 흐른다. 읽던 책을 집어 든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연출되는, 풍요로운 순간이다. 고요하다. 비로소 여백을 받아들인다. 

그때, 정적을 깨는 핸드폰 소리! '어! 엄마다! 어찌 오늘 한가한 거 알고 전화를 다 했네'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받는다. "어! 엄마!" 쾌활하고 격양된 내 목소리와 달리, 어머니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교무님 놀라지 말고 들어요. 아빠가 돌아가셨어요. 교당 김장하고 좀 늦게 왔더니, 집에서 이미. 아마 뇌출혈 같아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정신이 절벽처럼 까마득하다. "응?…" 모르겠다. 그리곤 잘 기억이 안 난다. 

무슨 정신으로 기차를 탔는지 장례를 치렀는지도. 기차에서 내내 울었고, 내리며 결심했다. "이제 울지 않는다. 내가 울면 엄마와 여동생은 못 버틴다." 그 다짐이, 기억의 조각으로 남아있다. 이상하게 한가했던 그 날 11월8일, 나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자를 보냈다. 이 글을 읽으며 가슴이 철컹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내 감정을 사실적으로 느끼는 사람, 그도 '경험'해본 거다. 
열반소식을 듣는 순간을, 그 처연하고 황망한 시간을 견디어 본거다. 그 일이 벌어지면, 나도 '슬플 것이라고' 생각은 했다. 겪어보니 그건 결코 '아는 것'이 아니었다. 

정산종사는 "하루살이는 하루만 보고 버마재비는 한 달만 보므로 하루살이는 한 달을 모르고 버마재비는 일 년을 모르며, 범부는 일생만 보므로 영생을 모르나, 불보살들은 능히 영생을 보시므로 가장 긴 계획을 세우시고 가장 근본되는 일에 힘쓰시나니라"고 법문했다. (〈정산종사법어〉 무본편 44장)

하루살이가 한 달을 경험하지 못하니, 짐작만 하듯 제대로 알기 전까진 다 짐작이다. 짐작만 하는 것은,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스스로 안다고 속다가, 제대로 알게 된 후엔 "내가 몰랐구나" 절감 하는 거다. 지금 나도 영생을 모른다. 당장의 손해가 영생의 이익임을 안다면, 손해를 보며 좋아할 텐데 손해가 여전히 싫은 나는 영생을 모르는 거다. 

아는 척을 열심히 하지만 모르는 것이 맞다. 그 어떤 날 진짜로 알게 되어, 지금의 무지를 절감하면 좋겠다. 그런데, 모르는 줄도 모르는 것보단 나은 건가.

/중앙중도훈련원

[2018년 11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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