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삶회·시민선방 최희공 원무 1

깨치고 터득해 마음의 자유를 얻는 모든 과정이 선(禪)
일심·정의양성이 합쳐져야, 상시응용주의사항이 무시선의 틀
완전히 비워져 분별주착 없는 진공, 성품으로 체 삼아야

[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진공묘유 수행문은 결국 무시선과 무처선의 공부길을 밝혀준 것으로, 삼학병진의 선공부가 생활을 떠나지 않도록 인도해 주고 있다. 하지만 무시선법은 좌선법이나 일기법처럼 방법이나 조항 등의 표현보다 해의적인 내용으로 이해되기도 하며, 해석에 있어서도 여러 의견이 있다. 무시선법에 대한 자세한 공부법과 이해를 위해 최희공 원무에게 문답했다. 이번 교리문답은 2회에 걸쳐 연재된다. 

- 원적무별한 진경에 그쳐 순연한 근본정신을 양성하면 성품을 오득하는 것이며, 마음의 자유를 얻을 수 있지 않는가? 어찌 무시선법을 다시 언급하시었나.
좌선으로 원적무별한 진경에 그쳐 순연한 근본정신을 양성하는 것이 성품을 오득하는 전체가 아니고 일부며, 순연한 근본정신을 양성했다고 해서 마음의 자유를 얻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 원리가 〈정전〉 무시선법에 소상히 밝혀져 있으나 선에 대해서 오해를 많이 하는 것 같다. 

무시선법에는 '선이란 원래에 분별주착이 없는 각자의 성품을 오득하여'라고 돼 있다. 다시 말해서 분별주착이 없는 성품을 오득해 '마음의 자유를 얻는 공부'가 아니라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는 공부'로 그 의미가 다르다. 분별 주착이 없는 성품을 오득했다고 자유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득(悟得)한 다음에 마음의 자유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공부까지가 선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오득'이란 깨치고 터득한다는 뜻이다. 깨치기만 해서 마음의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며, 깨치고 터득한 후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는 것까지의 모든 과정이 선이 된다.

또한 '원래'라는 뜻은 본래 마음자리 그 자체가 분별·주착이 없으니, 그 원리를 깨달아 분별·주착이 없는 행을 하라는 것이지 분별·주착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원래 분별·주착이 없는 자리를 알아서 착 없는 행을 하는 것이 선의 참 모습이며, 내 마음이 원래 일심이니까 일심을 만들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 일 그 일에 일심하라는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가 무시선법을 삼학병진의 대승선이라고 한 뜻은 '원래 분별주착이 없는 자리를 오득', 즉 깨치고 얻게 하는 견성과 양성의 공부와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는' 솔성을 다 포함했기 때문인 것이다. 종합해서 말하자면, 깨치는 과정과 터득하는 과정, 마음의 자유를 얻는 과정인 견성·양성·솔성의 세 가지를 통칭해 선이라 정의하는 것이지, 그중에 깨치는 것만도 선이 아니고 얻는 것만도 선이 아니다. 

- 무시선과 좌선, 삼학의 관계는 어떠한가.
무시선은 원래 동과 정이 끊임없는 선이 돼야 하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서 하는 선만을 고집하면 벌써 정에 집착한 것이며, 동정이 둘 아닌 자리를 모르는 것이다. 좌선에 집착하는 것은 원적무별에 속박돼 정에 묶여 마음의 자유를 잃어버린 것이다. 동할 때는 원적무별에 착하는 마음을 놓고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기를 주의해야 하는데, 원적무별을 추구하다가 취사를 잘못하면 무시선이 아니다. 일심양성과 정의양성이 합쳐져야 무시선이지 일심양성만이 무시선이 아니라는 것이다. 동정간불리선(動靜間不離禪), 동정간 간단없는 선, 그 원리를 알아 행해야 무시선이다. 

때문에 모든 마음 작용이 자성에 부합된다는 뜻을 보자면 우리의 자성은 원래 분별주착이 없는 중에 두렷하고 바른 것이기 때문에 그 없는 자리에서 마음을 작용할 때 밝게 분석하고 정확하게 판단해서 바르게 사용해야 그것이 선이라는 것이다. 거둬들이면 아무 분별이 없지만, 사용했다하면 명확해서 일체 만물 살려내는 덕을 나타내는 것이 선이다. 

곧 삼학의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기를 주의하는 공부로 정할 때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하며, 동할 때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양성하라는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무시선법의 근간으로 내정정 외정정을 말씀해 줬으니 일이 없을 때는 수양 연구에 전공도 하고, 일이 있을 때는 그 일 그 일에 일심, 알음알이, 취사로 실지 생활에 단련해서 일이 있을 때나 일이 없을 때를 오직 간단없이 공부를 계속하라 당부했다. 

그렇다고 수양·연구·취사를 단순히 나열한 것이 무시선이 되는 것도 아니다. 아침에 수양하고 낮에 경전을 공부, 저녁 일기점검을 한다고 무시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상시응용주의사항으로 하루 일과의 기본 틀을 세우고, 삼학을 복합 운용해 교법을 실천하되 육근을 작용하는 바가 다 공적영지의 자성에 부합되게 하여야 선이 되는 것이다.

- 진공으로 체를 삼고 묘유로 용을 삼는다는 뜻을 풀어내자면.
진공, 우리 성품은 완전히 비워져 분별주착이 없는 것이다. 요란함도 어리석음도 그름도 없고 없다하는 것도 없는 그 자리를 체(體) 삼으라는 것이며, 바탕 삼으라는 것이다. 묘유로 용을 삼으라는 뜻은 진공에만 머물지 말고 때와 곳을 따라 조화를 무쌍하게 나투라는 것이다. 

천만 경계에서 심지에 요란함도 어리석음도 그름도 없으면 진공이요 동정간 정·혜·계로 마음을 작용하여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묘유이지 정의 실천을 빼고 묘유가 따로 있지 않다. 마음만 자성에 부합돼 아무 생각 없이 작용했다고 묘유가 되는 것이 아니다. 보은의 도와 솔성요론을 실행하고, 사요실천, 계문수행 등 정의를 실행하되 안으로 아무런 착이 없는 빈 마음으로 하라는 것이다. 응하여도 주하는 바가 없이 마음을 작용하는 것이 진공묘유의 수행이다. 마음이 천만경계에 치연히 작용하지만 심지는 조금도 요란하고 어리석고 그르지 않고 상도 없다는 것이다. 

휴휴암좌선문에서 치연작용(熾然作用)이나 정체여여(正體如如)는 진공이요 종횡득묘(縱橫得妙)하여 사사무애(事事無碍)는 묘유이다. 예를 들자면, 어린 아이가 마음을 잘못 써 꾸짖을 때가 있어도 안으로는 미운 생각이 전혀 없으면 진공이요, 그 결과 어린 아이의 마음을 선한 마음으로 돌리면 묘유인 것이다. 빈 마음으로 했는데 결과가 안 좋으면 그것도 묘유가 되지 못한다. 희로애락이 절도에 맞아서 활생의 덕이 나타나야 묘유이다. 

또한 경계를 대해서 마음이 동하면 진공이 깨지게 된다. 욕심경계나 무서운 공포를 느끼거나, 자존심이 상해 마음이 동하거나 하면 진공이 아니다. 밖으로 경계를 대하되 부동하기는 태산과 같이하고 안으로 마음을 지키되 청정하기는 허공과 같이 하는 것이 진공으로 체를 삼는 것이다. 분별주착심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모르면 역시 진공으로 체를 삼는 것이 아니다. 분별이 일어나면 바로 알아차리고 본래 마음으로 돌이키면 진공으로 체를 삼는 것이다. 동하여도 동에 끌리지 않고 정하여도 정에 끌리지 않아야 한다. 

내 마음이 재색명리의 경계를 대했다 해도 물들지 않고, 정하여 일이 없을 때도 정에 끌리는 바 없이 미래를 준비하며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기를 주의하는 공부로 일심과 정의를 함께 양성해 가는 것이 진공으로 체를 삼고 묘유로 용을 삼는 공부이다.

-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선악업보의 차별이 생겨난다고 했다. 원래는 분별이 없지만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마음에 선악업보의 차별이 나타는 것이 일원상의 진리가 아닌가.
그것은 우주의 진공묘유이고 일원상의 진리이며, 현실세계에 나타나는 진리의 모습이다. 공부인은 이 우주의 진공묘유 원리를 보아서 인간의 선악업보를 정확히 분별해 행하되 진공에 바탕해 분별하고 행해야 한다. 희로애락의 감정과 분별이 없는 마음에 바탕해 희로애락의 감정과 분별을 나타내되 절도에 맞아서 만물을 생성 화육하는 활생의 덕이 나타나는 것이 진공묘유의 수행문이다. 

[2018년 11월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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